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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희감성 Mar 15. 2019

감성이 숨어버린 시대에 봄날은 오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감성 한 모금

미세먼지가 자욱히 뒤덮은 하늘이 낯설지 않은 봄날이다. 꽃샘추위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미세먼지의 경로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만 있다면 따가운 3월의 추위도 감사할 따름이다.


흔해 빠진 클리셰라 치부해온 ‘따사로운 봄햇살’,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간질간질한 표현들은 오래된 나무바닥 냄새가 나는 초등학교 교실을 아스라이 떠올리게 할 뿐이다. 즉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대체할 만한 선명한 봄의 아이콘이 번뜩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감성, 내가 되찾고 싶은 봄의 감성이란 그런 기억 저편의 간질간질함 같은 것인가보다. 가만히 있어도 감성으로 충만하다 못해 흘러 넘치던 시대를 자라온 세대로서 요즘엔 촌스럽다 할지 모르는 그 감성이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싸이월드 시대가 그 정점이었다.


그렇게 내게는 사계절이 진한 감성으로 빛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한 순간 순간을 수놓는 BGM들의 역할이 8할인 것 같다. 그래서 추억모음 인스타그램 계정들이 그렇게 반갑다. 그 몽글몽글한 감성이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날 때의 엔돌핀이 샘솟기 때문이다.


대중가요라는 개념조차 없던 미취학 아동 시절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왜 모든 노래는 다 사랑 노래야?” 엄마는 얼버무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그게 원래 그래서 그런 거라는 식이었다. 나도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게 학습효과든 어딘가 숨겨져 있던 DNA이든 사랑이란 원초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감정에 반응하고 탐닉한다는 것은 꽤나 시대를 초월한 엔터테인먼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일련의 현상 또는 과정을 어쩌면 우리는 ‘감성’이라는 단순한 이름의 속성으로만 대체해 표현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한때는 자연스럽기만 했던 때를 지나온 한 사람으로서 현대의 다소 매마르고 획일적인 방식으로 봄을 표현하고 다루는 미디어로부터 조금은 식상함과 답답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탓하는 건 아니다. 그저 좀 서글프고 안타까워서 그렇다.


그래서 말이다. 아이폰의 날씨예보에서는 해로만 가득한 예쁜 날씨가 이어지는데 실상 미세먼지가 뒤덮인 이 잿빛 세상을 볼 때마다 맑은 공기만큼이나 맑은 하늘을 순수히 노래했던 그 시절 감성도 그만큼 그리워진다는 거다. 긴 겨울 끝에 찾아온 봄을 기쁘게 맞이하던 그 시절, 그 향기 말이다.


누구를 붙잡고 이야기해도 하품만 할 것 같은 그런 얘기인 걸 안다. 봄날의 춘곤증처럼 그냥 우울하게만 들릴지도 모르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적기로 했다.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아도 내 안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감성을 더는 묵히지 않기 위해서다.


미세먼지를 뒤덮은 이 도시와 연일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뉴스들에 피로해진 우리네 인간미마저 매말라 간다 해도 누군가의 영혼을 적실 감성 한 모금을 위해 그렇게 적어보기로 한다. 언젠가 되찾을지 모르는 봄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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