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길들여진다는 것

만약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by 이열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그저 그렇게 잊혀지는 사람이 있고, 모든 순간순간이 사진처럼 남아 선명하게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어른들의 동화라고 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사막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길들이다'라는 의미를 나에게 너무나 뼈저리게 알게 해 준 한 사람과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주려고 한다.




반년 전, 나는 특이한 모임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정기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소모임을 열 수 있었는데, 주로 대화를 하는 모임에 웬 막춤 모임이 생긴 것이었다.

술도 못 마시는 나는 20대 초반 클럽에 가서도 춤 한번 제대로 추지 못했고, 사람들을 따라 흔들흔들 리듬을 타보아도 어색한 내 모습에 이내 부끄러워졌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런 모습을 깨보기 위해 그 모임에 참가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자기소개를 하며 간단하게 술을 한잔 했다. 그리고 취기가 올라오기도 전에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이정현-와, 자자-버스 안에서, 등등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노래. 이런 노래에 춤을 추니 절로 흥이 올랐다. 평소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던 나는 일반인 치고는 그럴듯한 실력으로 그곳에서 주목을 받았고, 그중에 제일 조용해 보이던 한 남성분은 내가 자자-버스 안에서 남자 파트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마치 자자의 멤버처럼 목소리를 흉내 내며 완벽하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조용해 보이던데.. 의외인데?'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언제 물어보지?' 하며 노래 부를 때도 그 사람 주변에서 그 사람을 관찰하며 노래방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노래방 시간이 끝나자 다들 처음 보는 사이로 돌아갔다. 춤추고 노래부를 때와는 다르게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와 나는 노래방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 지금이 타이밍인 것 같았다.


"직업이 뭐예요?"

훗날 들은 말이었는데, 이 질문을 듣고 '정말 내가 궁금했구나' 싶었다고 한다. 보통은 "무슨 일 하세요?" 라거나 돌려 물어보는 편인데 저 질문을 듣고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웃음) IT회사에 다녀요."

이 대화를 주고받고 헤어진 후 그는 모임 어플을 통해 나와 연락해보고 싶다며 내 연락처를 물어봤고 ,

그렇게 그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

일찍 결혼을 하고 싶어 하던 난 항상 자상한 사람과 만나고 싶어 했다. 버럭 하는 성격이 없는 화 자체가 없는 무던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그는 닮고 싶을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와 나는 하루에 많은 시간을 대화하며 보냈다. 그 덕에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나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내 휴무에 맞춰 휴가를 써서 내가 있는 동네로 와주었고 하루 종일 같이 데이트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데이트가 끝 나갈 즈음 그는 나에게 고백해왔다.


"소영아, 나 너 좋아해. 너는 어때..?"

놀랬다. 오늘 고백받을 줄은 몰랐다. 조금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 두 번째 데이트였기 때문이다. 난 아직 사귀고 싶다는 확신은 없었다.


"난 헤어지는 게 너무 싫어서.. 처음부터 '이 사람이면 연애하다 결혼해도 괜찮겠다.' 싶은 사람 아니면 연애를 시작할 생각이 없어."라는 나의 말에 그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물었고, 당황한 나는 "아니! 아니야...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아니고... 좋은 사람 같아..."라고 하며 얼굴을 붉혔다.


카페에서 나와서 차로 걸어가며 그는 내 손을 잡았고, 나는 얼떨떨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고 아직 이 정도의 마음의 확신이 없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고민에 그가 내 손을 잡은 것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다음날 그는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했다. 자신은 손 잡은 게 사귀자는 뜻이라고... 안 사귀는 사람과는 손도 안 잡는다는 말에 이미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과 내가 그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며 예쁜 마음으로 다가와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리는 처음부터 매우 뜨거운 연애를 했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누군가 자신에게 꼭 맞는 여자친구를 선물해준 것 같다고 했고, 나와의 인연을 소중히 할 거라고 했다. 이 나이에 이런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며 30대가 되고 나서는 이런 연애는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눈뜨는 것이 행복했다. 그는 나의 목소리가 마치 '봄'같다고 했으며, 내가 전화 걸 때마다 내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해하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쉬는 날 아침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잠이 안 깬다며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말을 예쁘게 하고 정성껏 길게 편지처럼 말하는 그에게 나도 그와 같이 온 마음을 다해 정성껏 답장을 해주었다. 우리는 각자가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대화를 주고받았다.


는 소영이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해서 연애를 한 게 아니라, 가 이제 행복해서 영이를 이뻐할 수 있어서 연애를 시작한 거야. 그만큼 영이가 좋고 나 스스로가 이제는 결핍이 없어서, 영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서 연애를 시작한 거지. 내 행복은 내가 챙기는 거고 영이가 주는 행복은 그래서 감사하고 고마운 거야.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 스스로 행복한 지금 그를 만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감사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이 뜨겁고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이 사랑에 너무나 감사하고, 이 사랑을 꼭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우리는 한 달 내내 매 주말마다 같이 시간을 보냈다. 계획을 하기도 했고 즉흥적으로 주말을 같이 보내기도 했다. 서로가 함께 맞이하는 주말이 너무나 행복했다. 주말을 함께 보내는 계획을 짜고 나면 주말이 오기까지 며칠을 기다리며 두근거리며 행복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사막여우의 "만약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는 대사처럼 우린 며칠 전부터 들떠있었다.


"우리 만나기로 한 내일 하루 가지고 며칠 동안 이렇게 들떠있는데 내일 하루 지나면 또 어떡해?"라는 나의 물음에

"그러면 그다음 주를 계획하고 ,

그리고 그다음 주를 계획하고,

그렇게 계속 살아가자 같이.

그러다가 너무 힘들면 같이 살자.

아직은 매주 만나는 거로 행복하니까

힘들지만 견뎌보자 그러다 더 안 되겠으면... 그때" 라며 그는 나에게 마치 프러포즈 같은 말로 감동도 주었다.


만날 때마다 그 순간을 소중히, 마지막인 것처럼 좋아해 주겠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영화감독이라는 꿈이 있었다. 일 끝나고 집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그렇게 꿈을 향해서 나아가면서 나에게도 넘치도록 집중해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꿈이 있고 계획이 있고, 열심히 돈도 벌며 나에게도 벅찰 정도로 사랑을 주는 사람. 이상하게 내 마음에 확신이 서기 전에도 이 사람과 연애하게 되면 결혼하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와 연애 한 달 동안 그 마음은 굳건해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하게 길들여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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