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하정우는 걷는다. 하루에 3만 보, 많게는 10만 보까지. 그의 걸음으로 10만 보가 84km쯤 된다고 하니 하루에 최소 20km씩은 걷는 거다. 여행 가서 2만 보쯤 걷고 무릎이 나갔던 개인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엄청난 걷기량이다. 출근길 1만 5천 보, 여행지에선 4만 보, 급기야 577km 국토대장정까지 했다. 왜 그렇게까지 걸을까?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천만 관객쯤은 너끈히 찍는 국민 배우이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무명 시절부터 걷기는 유일한 길동무였다고 회상한다. 예전에 모델 한혜진이 대화의 희열에서였나, 일도 사랑도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운동만은 유일하게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몸만들기만큼은 내가 통제할 수 있고,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고. 한혜진의 운동처럼, 하정우에게 '걷기'도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
"내 발 사이즈는 300밀리미터다. 가끔 내 큰 머리에 어지러운 생각과 고민이 뭉게뭉게 차오르기 시작할 때면, 그 생각이 부풀어 머리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내 왕발이 먼저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 <걷는 사람, 하정우> 중
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그림 그리는 사람.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갖고 있던 하정우의 이미지는 거친 예술가였다. 술도 진탕 마시고 입도 걸걸할 것 같은. 스스로도 그런 이미지를 인정하는데, 알고 보니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의 일상을 세 단어로 요약하자면 끈기, 루틴, 습관. 프로 생산러다.
끈기, 루틴, 습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견디는 일'의 중요성이라고 하정우는 말한다. 때로는 두렵고 또 때론 지루한 모든 과정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하고, 내 몸과 마음을 그에 맞춰 단단하게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고. 결과는 좋을 수도,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에 휘둘리거나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면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말은 단단했다.
배우이기 때문에 힘든 점은 연기하면서 요동치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 심장이 제멋대로 날뛸 때면 부정맥에 걸릴 것만 같아 걱정될 정도라고 한다. 프로 생산러로서의 면모가 빛나는 부분은 이를 다스리는 방편이다. 하정우는 말한다. "변덕스러운 감정에 나를 맡겨둘 게 아니라 규칙적인 루틴을 정해놓고 내 몸과 일정을 거기에 맞추는 편이 좋다. 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 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귀찮은 마음에 종종 사로잡힌다. 몸이 아픈 날에는 특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또 걷나, 생각하지만 그럴 땐 한 발을 먼저 뗀다고 한다. 망설이고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죽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최소한의 걸을 만한 힘 정도는 남아있다고.
단지 걷는 사람일 뿐이지만 매일의 걸음들이 모여 지금의 하정우라는 배우를 만든 것이 아닐까. 각자의 영역에서 크고 작은 족적을 찍는 사람들에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라며 하정우는 말한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 걷는 사람, 하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