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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May 23. 2024

결혼식까지 3개월, 실업자가 되었다

나의 결혼생활. 3

아내와 결혼하기 전 연애 기간은 3년 4개월정도였다.


3년 4개월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큰 일은 실업상태에서 결혼할 뻔 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IMF로 회사마다 사람을 줄이고, 경비를 줄이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건 회사가 남아 있을 때 걱정할 일이고, 문 닫는 회사가 늘어갔다.

취업을 하던 3월에도, 9월에도 대한민국은 올해도 성장을 유지할 거라며, 외환위기는 없다고 떠들어댔지만, 모든 게 거짓이었고, 허상이었다. 채용 시장은 이미 얼어붙어 있는데 정부와 언론만 그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어렵게 취업한 회사를 잘 다니던 12월 초, 근하고 10시가 조금 지나니 회의를 마치고 내려온 부서장이 기획팀 전체를 불러 모았다. 그러더니 A4용지 한장씩을 나눠주었다.

-사직서 써야 하니까 볼펜 가져와. 나도 같이 써야 돼. 이달 말까지적어.

부서장은 좋은 사람이었고, 능력도 있어서 내가 입사할 때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돼 나와 같은 날 출근한 사람이었지만, 이 파고를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종일 업무가 되지 않았다. 술 마시는 저녁 자리에 아내(가 될 사람)이 왔고, 신혼집이라고 얻어둔 집까지 가는 지하철에서 고개를 떨구고 울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했지만, 모두들 놀고 있었다. 회사에는 두명이 남게 되었는데, 남은 채권을 정리하기 위한 인원이었고, 이들의 추가 고용기간은 3개월 정도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자리를 찾기 위해 정보를 주고 받았지만, 신통할만한 건 없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남은 날짜까지 편한대로 출근하라는 공지가 떴다. 어짜피 나와도 할 일이 없으니 일자리라도 편하게 알아보라는 얘기였을 거다.


결혼식까지는 이제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실업자가 되었다.

이제 경력 1년을 채우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종일 인터넷을 뒤지는 날이 있었고, 아직 자리가 남아있는 회사에 붙어있는 친구를 만나러 갈때도 있었다. 아내는 퇴근하면 나와 같이 식사를 하고, 결혼식 전에 잠시 있던 처형네 집으로 갔다. 나는 혼자 인터넷을 뒤지며 혹시 내가 놓친 정보는 없는지, 그리고 구인 정보를 찾으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며 밤 시간을 보냈다. 가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멀리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나가면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해 겨울엔, 'IMF로 결혼식 미루는 예비부부 급증'이라는 신문 기사가 몇 번 등장했다.


우리는 암을 앓고 치료중이던 엄마를 봐서, 결혼을 치르기로 했다. 다만, 양가 부모님께 나의 실질 상태를 알리지 않기로 했다.

결혼식 주례를 해주시기 했던 교수님께 찾아가, 최근 회사가 문을 닫으며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다만, 결혼식때 굳이 그런 얘기까지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사람 좋으신 교수님은 잘 알았다며, 걱정이다라고만 말씀하셨다.


아들이자 사위의 실직 상태도 모른채 결혼식을 치른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 주례를 봐주신 교수님은 졸지에 공범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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