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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보노야 Aug 06. 2024

K의 퇴사

직장생활과 처세의 어려움

K이사가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낸 건 이직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K의 갑작스러운 사직서 제출은 회사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대표와 관계가 좋았고, 대표와 창업 동지인 부사장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그가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왜?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동료 몇 명과의 송별식에서 K가 얘기한 퇴사의 전말은 이렇다.




K가 사직서를 내기 전 해에 향후 회사의 실적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K는 대표, 부사장과 자주 회의하고 식사를 하는 사람이라 프로젝트의 내용과 배경, 진행 과정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필요성과 골격을 짠 사람은 대표였지만, 실제 진행을 주도한 사람은 부사장이라는 것 또한 상세히 알고 있었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되면서 K는 임원들과 몇 차례의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술자리는 대표 및 부사장과 K 이렇게 셋이 가진 술자리와 회사의 임원 모두가 함께 하는 술자리 등 두 차례였다. K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술자리와 회의석상에서 했던 몇 마디의 말 때문에 사직서까지 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먼저 K가 대표, 부사장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프로젝트 얘기가 나왔을 때,  K는 부사장의 기획력과 추진력을 언급하며 부사장 덕분에 프로젝트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여러 차례 부사장을 치켜세웠다. K의 이런 말들은 K의 평소 스타일로 미루어볼 때 결코 아부나 사탕발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K에 따르면 대표와 부사장 모두 공감하며 즐겁게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칭찬과 격려가 서로에게 쏟아지는 임원들끼리의 회식자리에서 K는 대표 및 회사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는 동시에 부사장의 기획력과 추진력을 또다시 치켜세우는 건배사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술잔을 부딪히며 부사장의 능력에 대해서 진심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이 날의 술자리는 유쾌했고, 즐겁게 이어졌다. 다만 1차를 마치고 2차로 옮겨갈 때 대표와 부사장은 빠지고 나머지 임원들만이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했다.  


K에 따르면, 두 차례의 회식이 있은 후 대표와 자신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평소 K는 대표와 단 둘이 술이나 커피를 자주 마셨는데, 그때 이후 단 둘이 가진 자리는 한 번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회사 내에서 업무와 관련해 둘이 혹은 부사장과 함께 셋이 하는 회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결국 K는 연말 연봉협상에서 좋은 얘기를 듣지 못했고, 다른 임원들이 업무 분야를 조금씩 넓히는 상황에서 K는 늘어난 것도 줄어든 것도 아닌 제자리인 듯 하지만, 왠지 밀려난 듯한 느낌의 업무 영역 조정이 있었다고 했다. 이후 몇 차례 회의시간의 사소한 언쟁, 업무 내용을 둘러싼 이견 끝에 K는 여름이 오기 전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K의 어떤 행동이 문제였던 것일까? K는 늘 하던 대로 행동했을 뿐이고, K의 말과 행동엔 가식이 없었고 누굴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그러나 K의 말과 행동은 대표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대표의 기분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좋은 말도 때를 잘못 가리면 나쁜 말이 된다. 부사장에 대한 K의 좋은 말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프로젝트를 만든 사람은 대표였고, 대표가 있는 자리에서 연거푸 나온 K의 말은 자칫 창업자의 리더십과 기획력을 무시하고 K는 '부사장이 회사를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나 보네 하는 생각도 하게 만들 수 있었다. '대표의 입장에서 보자면'. 


물론 대표라는 사람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부사장의 능력과 성취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표가 겉으로 드러낸 마음과 속마음이 어떻게 똑같은지, 다른지 알 수 있을까? 부사장을 치켜세우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를 발굴해 낸 스스로의 인사이트에 더 많은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K의 말과 행동에 잘못된 부분은 없지만, K가 두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모두와의 술자리에서 부사장의 성취를 추켜올리며 결국 프로젝트의 필요성과 골격을 짠 대표의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직장생활은 어렵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이익을 위해 뭉쳐서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관계를 바탕으로 모여 이익을 만들기 위해 일하다가도 다툼이 생기고 깨지고 마는 일이 빈번한 게 현실인데,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직장생활은 오죽할까? K가 그만두게 되었을 때 아쉬워했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K의 자리까지 이어받게 될까 기대했을 것이고, 실제 그렇게 사람은 K의 퇴사를 아쉽지만 '스스로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겉과 속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을까

K는 선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대표도, 부사장도 다른 임원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K는 어찌 보면 눈치가 조금 부족했고, 조직이 돌아가는 권력 구조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가 그토록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부사장도 K의 업무 축소와 퇴사를 막지 못했다. 


사기열전의 맹자.순경열전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이윤은 솥을 짊어지고 요리사가 되어 은나라 탕왕에게 다가가서 힘을 다해 제왕의 일을 이루게 하였고, 백리해도 수레 밑에서 소를 치다가 목공에게 등용되어 목공을 천하의 우두머리로 만들었다. 이 두사람은 처음에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춘 뒤에 바른길로 가게 했다.’ 


조금 다르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나는 사마천이 언급한 이 말 또한 위에서 언급한 K의 케이스와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어느 집단, 어느 조직에서든 자기의 목소리로 상사와 조직을 움직이려면 먼저 집단 내에서 자기 위치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K가 처세와 인간관계론에 있어 타고나 몸에 밴 것이 없었다면 그래서 수천 년 전 중국의 한비자가 쓴 '유세의 어려움'같은 글이나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영웅과 그들 주변 이인자들의 이야기를 미리 읽고 배워 익혔더라면 어땠을까. 타고난 본성은 못 바꾼다 해도 K의 처세술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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