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출신으로 서울 중위권 대학을 졸업한 후 에이전시에 취업했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남들보다 승진이 빨랐다. 팀원이 4명인 팀의 팀장을 맡은 지는 3년째였다.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술을 좋아해 일주일에 한두 번은 회사 사람들과, 한번 정도는 업계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S가 이직을 결심했던 건, 회사 내에서 S를 잘 봐주던 이사가 대표와의 갈등 끝에 그만두는 걸 보면서다. S의 그런 판단의 이유가 의리 때문이었는지, 더 있어봐야 더 잘되기는 쉽지 않다는 실리적 판단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S의 상사였던 이사는 나가기 전 S와 차 한잔을 나누며 '잘해~'라고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S는 이력서를 꽤 많이 썼는데, 기업체 홍보팀이나 마케팅팀이 대부분이었다. 에이전시에서 일을 잘하면 기업 내 관련팀에서 좋게 본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에이전시를 하면서 지친 탓도 컸다. S가 이력서를 뿌린 지 한 달쯤 지나자 중견기업이라고 하기엔 좀 크고, 대기업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은 Y그룹 홍보팀에서 연락이 왔다. 정식 인터뷰 전에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은데 시간이 되느냐는 연락이었다. 전화 인터뷰에선 이직하려는 이유와 현재 회사의 포지션,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상세히 물어봤다. 그리고 자신들이 뽑는 직급에 대해 얘기했고, 레퍼런스 체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일주일 후 Y그룹 본사에서 정식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혼자 할 줄 알았던 인터뷰 현장에는 S뿐 아니라 디자인 업무를 한다는 경력직 여자 한 명이 더 있었다. 한 시간이 채 안 걸린 인터뷰가 끝나자 인터뷰를 주도했던 팀장이 식사를 하고 가라는 얘기를 꺼냈다. S도, 다른 여자분도 거절하지 않았다. 둘 다 오후 일정을 빼고 참석한 인터뷰였다. Y그룹 본사 인근 고깃집에서 시작한 반주를 겸한 점심을 하고, 낮에는 커피 손님이 주일 거 같은 카페에 들어가 탁자에 병이 수북이 쌓이도록 맥주를 마시고 나오자 이미 다섯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동석했던 과장이 업무를 정리하러 사무실로 돌아가자, 팀장은 면접자 두 명을 데리고 본사 빌딩 지하의 한 카페로 들어갔다. 여섯 시 반이 넘어 사무실로 갔던 과장이 다시 합류했다. 팀장은 술자리에서 '두 사람 다 우리하고 잘 맞을 거 같으니, 앞으로 잘해봅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S는 3차로 자리를 옮긴 이후, 기억이 군데군데 끊겼다고 했다.
S가 어렵게 생각해 낸 것들은,
-동반한 여자분은 9시쯤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신도 9시쯤 일어난 거 같은데 10시 반쯤 다시 카페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갔을 때 누군가 한 명이 더 있었던 거 같다
-횡설수설 떠들면서 몇 잔의 술을 더 마신 후 팀장, 과장과 함께 자리를 파했다.
이런 것들이었다. S는 집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 Y그룹의 과장이 S에게 전화를 걸어와 사장 면접 일정을 알려주었다. 사장 면접 역시 예의 경력직 여자와 함께였다. 사장 면접을 본 다음날 Y그룹의 과장은 전화를 걸어와 S의 불합격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말과 함께 S뿐 아니라 경력직 여자 또한 불합격했음을 알려줬다.
S는 1차 면접 후 가진 술자리를 너무 편하고 좋은 자리로 생각한 나머지 '오버'했을 것이다. 특히 팀장과 과장이 보여준 같이 일할 사람에게나 취할만한 호의적인 태도를 '합격 통보' 쯤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알고 있다.
합격 문자를 받고 출근해서 책상에 앉기 전까지도 합격을 과신하지 말 것이며,
너희 제품을 살게 라는 말을 믿지 말고, 물건이 출고되고 상품 대금이 입금되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물건이 팔린 것이며,
우리 회사에 대해 그가 가진 좋은 인상을 믿지 말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일이 시작되어야 비로소 그와 우리 회사와의 거래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어쩌면 S의 불합격은 Y그룹의 사장이 보는 인재 기준과 S가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마 그럴 확률이 더 클 것이다. 실무진에서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을 잘 골라서 면접장에 올린다고 해도 결정권자가 생각하는 기준을 100% 맞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비자가 '유세의 어려움'이라는 문장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마음과 생각을 모두 드러내는 결정권자는 드물 테니까.
"상대방이 높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데 유세자가 큰 이익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속된 사람이라고 천시받을 것이니, 그 사람은 등용되지 못하고 배척당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상대방이 큰 이익을 얻고자 하는데 유세자가 높은 명성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몰상식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하여 틀림없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높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 척할 때에 유세자가 높은 명성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유세자를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를 멀리할 것이며, 만약 이런 경우에 큰 이익을 얻도록 설득하면 속으로는 유세자의 의견을 채용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그를 배척할 것이다. "(한비자, 유세의 어려움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S가 1차 면접 이후에 보였던 행동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는 합격을 갈망했고, 이직을 원했지만, 단순히 그의 행동만으로 판단하자면 '그는 절실하지 않았고, 노력하지 않았다'. 팀장과 함께 가진 술자리 자체가 면접의 연장이었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지 S의 답이 궁금하다.
얼마 전 식당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옆자리의 다른 손님 일행 두 명이 큰 소리로 떠들며 음식을 먹는 걸 보았다. 최근 간 여행에서 가족끼리 다툰 이야기, 정부의 정책 이야기 등을 하다가 불현듯 앞의 일행을 비난하다가 또 큰 소리로 떠들고. 음식이 우리 테이블로 튀지는 않았지만 불쾌한 기분에 얼른 식사를 마치고 나와버렸다.
'사람의 행동과 외모, 말투와 언어 그리고 그가 뱉는 말들은 그의 살아온 이력과 생각, 인격을 모두 대변해 드러낸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 생각이 너무 과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