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 기기 영업부터 시작해 회사를 옮기더니 이미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를 기업 대상으로 판매했고, 점차 웹, 시스템 개발 등으로 영역을 바꿨다. 모바일 시대가 오면서 모바일 앱 개발로 영업 영역도 넓어졌다.
웹/시스템 개발을 하던 회사에 함께 있던 개발 이사가 독립하면서, 자신과 같이 일하자는 말에 뒤늦게 합류한 것이 2년 전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도 쉽지 않았지만, 최근 2년간은 정말 힘들다고 했다. 코로나가 끝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R&D 예산을 줄였고, 그건 개발 회사나 개발 업무를 프리랜서로 하던 사람들에겐 직격탄이 되었다. 개발 외주가 줄고, 협의가 진행 중인 것들도 차일피일 시작일이 늦춰지면서 회사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결국 몇 달 전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회사가 힘들다고 하니 급여도 늦게 받고, 개발직원들 급여 지급을 위해 개인 자금을 융통해 회사에 넣기도 했지만 자리를 더 보전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업만 하는 임원의 급여와 법인카드를 유지할 만큼 회사는 넉넉하지 않았다. 개인 자금을 돌려받고, 밀린 급여 중 한 달 치는 포기하는 대신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하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W는 내게 신규로 개발 영업을 해서 가져오는 프로젝트에 대해 회사와 수익을 나누기로 했다고 했다. 또 필요하면 회사의 자리도 아무 때나 나가서 쓸 수 있다고 했지만 얼마 후 회사는 사무실을 줄여 이사했고, 이미 소속이 없어진 W가 나가서 앉아있을 곳은 없었다. W가 내게 찾아왔을 때는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이어서, '영업도 계속할 것이고, 회사에 자리도 있어서 거길 오가며 일할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저쪽 회사 입장에서 영업이야 새로운 고객을 개척한다는 생각에서 생기면 좋은 것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원래 없는 셈 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소속이 바뀐 직원이 회사를 드나드는 것이 과연 편한 일인가? 기존 직원들이 W와 얼마나 깊이 업무 얘기를 할 수 있을까? W가 회사를 드나들면 서로에게 뻘쭘한 상황이 곧 생길 것이 뻔히 보였다.
웹툰 '미생'에서-직장을 그만둬본 사람이라면 다 공감가능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얼마 되지 않아 W는 내게 사무실을 자주 오게 될 거 같다는 얘기를 날씨 얘기 하듯 건넸다. 그리고 직원들끼리 워크숍을 간다는데 자기만 빈 사무실을 들어갈 수 없는 것 하며, 그 회사가 공간을 좁혀 이사 간 것과 사무실에 들어가도 잠깐 앉아 작업을 하고 나오기가 서먹하고 어색해졌다는 등의 사정을 설명했다.
아무튼 그렇게 W는 내가 있는 사무실을 본격적으로 드나들게 되었다.
W는 수시로 내게 회사 설립, 자금 운영 등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W의 질문에 답하면서 사업을 시작하기 전 나의 모습도 W와 같았을까 궁금해졌다.
W의 모습은 회사라는 조직 속에서 하라는 일만 하던 톱니바퀴의 나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W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자신이 많은 걸 알고 있거나 필요한 일을 하는 많은 인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W는 여태 회사를 다니는 동안 뭔가를 굉장히 많이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혼자 많은 걸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글쎄, 나는 W의 생각에 동의하기 힘들다.
가령 자금에 대해 고민할 때 기보, 신보, 중진공 자금 그리고 각종 정부 지원 사업에 대해 알려주면, W는 '아, 그건 알지. 그런데 신보 쪽 친한 사람이 얼마 전에 그만뒀다네' 또는 '전에 회사에서 중진공 자금을 쓴 적이 있었어'라고 답을 했다. 그리고 '만약 누가 내게 법인 설립 전에 천만 원을 빌려주면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라는 내 생각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때 나는 W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몇 가지를 얘기해 주었는데, 그건 이런 것이었다.
-생기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갖고 고민하지 마라. 돈이 없어서 고민이지, 돈을 받을 수 있다면 일단 받으면 된다. 문제없이 잘 정리하는 건 네가 아니라 세무사 하고 얘기해라.
-네가 뭔가 새로 시작할 때 누군가 너한테 조언을 해주면, 네가 혹시 알고 있는 내용이거나 갸우뚱한 게 있다 해도 알았다거나 그러겠네라고 대답해라. 네가 만약에 어 그건 나도 잘 알지라고 대답하면 다음부터 그 사람은 너한테 뭘 알려주고 싶지 않을 거다.
-어떤 일을 할 때 누굴 알고 있어서, 내가 아는 누군가가 도와줄 거 같아서 라는 생각은 그냥 버려라. 네가 혼자 뭘 할 수 없다면 그건 누가 도와줄 수도 없는 것이고, 세상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타인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예전에 뭘 했었는데, 예전에 이런 걸 했을 때는 이랬는데'라고 하지 마라. 그때 틀리고 지금 틀리다. 네가 예전에 했던 걸 갖고 잘할 거면 나한테 왜 물어보냐.
사람들은 회사 내에서 많은 일을 배우고 해내고 있지만, 회사라는 큰 우산의 고마움을 잘 모르고,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한 회사에서 혹은 회사에서 회사로 옮겨 은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회사라는 우산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생존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나는 회사 다닐 때 대체 뭘 한 거지?'라고 고민한다.
회사를 다닐 때 고민하고 배워야 할 것들은 어떤 것일까? 수도 없이 많겠지만 평생 고용된 직원으로 월급걱정 없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면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이것이다.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회사를 내 회사라 생각하고 일하는 것이다. 재무, 마케팅, 기획, 영업 모든 분야에 관심가지라는 것이다. 비용을 어떻게 줄이고, 수익을 어떻게 늘릴 것이며, 나는 영업을 하고 있지만 기획과 마케팅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월급날 월급은 어떻게 내 통장에 들어오는지 궁금해하고 알아가면서 일하는 것이다.
회사를 나와 마침내 자기 일을 시작할 때 준비가 안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예전에 이거 했었는데', '나 누구 아는데'. 회사의 구성원들과 함께 만든 성취에 대해 이제 혼자서도 다 해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라. 일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