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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보노야 Sep 20. 2024

말의 성찬

남이 아니라 나를 믿는게 낫다

P는 기자 생활을 잠깐 했고, IT업계에서 오래 일을 했다.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인맥을 만들었고 덕분에 기자를 그만둔 후에도 그걸로 먹고살았다고 한다. 4대 보험이 되는 직장을 그만둔 후에는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프리랜서 형식으로 일을 했고 수십 군데의 회사에 홍보 자문을 하며 월급 형태로 보수를 받았다. 


좀 더 전문적인 이론과 관련 업계 인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P는 대학원을 다녔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쯤 책을 한 권 냈는데 책은 만 부 정도 팔렸고, 덕분에 여기저기 강연을 많이 나가게 되었다. 다만, P와 같이 대학원을 다녔던 사람들은 P가 낸 책의 콘텐츠 상당 부분이 특정 강의에서 들은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험담 같은 술자리에서 '좀 심했다. 수업 시간 내용을 그대로 넣으면 어쩌라는 건지. 교수님한테 허락은 받았나? 아니 허락했어도 그걸 그렇게 쓰다니 용기가 있는 건가? 뻔뻔한 건가?', '남의 걸로 자기 책 내는 것도 능력이다 능력'하는 얘기들이 새어 나왔다. 


P는 평소 본인이 알고 있는 IT업계의 CEO들 얘기를 많이 했는데, 대부분 이름을 불렀다. **이는 어떻고, **이는 언제 봤고, **이는 어떤 애야, **이 걔는 처음에 사업할 때..라는 식으로. 대부분 알만한 기업의 CEO들이었는데, P로부터 처음 그런 얘기를 들으면 오.. 하는 감탄을 하게 되지만 여러 번 듣게 되면 '퍽이나'하는 말이 속에서 올라오곤 했다.


P는 대학원에서 동기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뒷말이 많이 나왔는데, 겉으로는 안 그런 듯해도 동기들을 그들의 직업, 다니는 회사 혹은 운영하는 회사 등에 따라 다르게 대한다는 것을 동기들은 알아차렸다. 어느 순간 P는 함께 하는 모임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이익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만 개별적으로 접촉하며 찾아다닌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P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너네 이런 거 하지 않아? *** 소개해줄까?' 하는 식으로 던졌던 말들을 단 한 번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없다는 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K는 스타트업을 차린 지 5년이 넘은 CEO다. 

매출이 많지 않은 사업체를 꾸려오면서 소액의 투자를 꾸준히 받으며 회사를 지탱해 왔다. 그러다가 설립초기부터 해오던 사업 아이템을 다른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 주효해 작년엔 결국 큰 투자를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K를 좀 아는 J는 창업을 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만약 창업을 하게 된다면 개발, 영업, 투자 유치 등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창업 아이템이 괜찮은지 등에 대해 K에게 상의를 한 적이 있다. K는 개발, 영업, 사업계획서 작성, 투자 등에 대해 본인 생각을 얘기해 줬다. 특히 J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 부분은 투자에 대한 것이었는데, J가 말한 아이템이 너무 괜찮아 창업을 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 J가 창업을 한 후에 투자를 받지 못한다면 K가 나서서 투자자를 소개해주거나 자신의 회사에서 약간의 투자를 해주겠다는 부분이었다. 


얼마 후 J는 창업을 했다. 대단한 모험가적 자질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K의 격려와 투자의지 그리고 이 아이템이라면 투자를 받을 수 있는 투자자를 소개해주겠다는 것 등이 J의 행동에 도화선이 되었다. 약간의 자본금으로 창업한 후 아이템을 만들어가던 중 J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투자를 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J는 K를 다시 만나 사업계획서와 개발이 다 되어가는 서비스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미팅이 끝나갈 때 조심스럽게 투자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K는 좀 다른 느낌의 말을 했다. 


뭔가 미묘하게 어감이 바뀐 말. 

'음, 가능할 거 같긴 한데, 지금은 좀. 일단 서비스를 론칭하고 뭔가 성과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필요할 거 같아요. 또, 저희 같은 경우는 5천만 원 이상 쓰려면 투자사 컨펌을 받아야 하는데, 요새 분위기가 안 좋아서 그것도 좀 쉽지 않을 거 같고. 대표님과 저희가 같이 하는 뭔가가 확실하게 눈에 띄지 않는 이상은요. 일단 좀 더 만들어보고 얘기하시죠.'


K는 결국 발을 뺐고, J는 K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J는 내게 '남이 뭘 해주겠다는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에이 처음부터 말을 말 것이지'라고 여러 번 얘기했다. 




W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W가 회사를 다닐 때 친하게 지냈던 지인은 W에게 이런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네가 사업을 시작하면 내가 투자를 해줄게. 나한테 얼마의 돈이 있는데, 이중 얼마를 당신한테 투자해 줄게'라는 식이다. W의 말로는 그 지인이라는 사람이 형과 돈독한데, 형이 무슨 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게 되어 동생에게 몇 억을 줬다는 것이다(그게 사실이라면 보통 형제 사이는 아닌 거 같다). 그래서 본인은 그 돈을 있는 듯 없는 듯 생각하고 있는데, 사업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그게 너라면 돈을 투자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W가 그 지인이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진척 상황을 얘기했고, 그때마다 그가 말은 이런 거였다고 한다. 

-투자하고 싶어요

-주식에 넣어뒀는데 팔아서 진행할게요

-별 이견은 없겠지만 아내와 얘기는 해야 하니 시간을 좀 주세요

그 지인이라는 사람이 했다는 말을 잘 들어보면, 투자 생각은 있지만, 결론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투자를 하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상의해야 할 사람도 있고, 돈도 묶여있다는 것이다.


내 경험상 이럴 때 해야 할 말은 명확하다. '투자에 긍정적인 생각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얼마의 자금이 필요한데 가능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게 말을 전해 들은 W는 그 지인에게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고 한다.

W의 지인이 투자를 했을까? 당연히 아직도 하지 않았다. 





사업을 하는 S는 아는 사람이 사업을 한다고 하면 늘 먼저 연락을 해서 만나고,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마치 뭐라도 해줄 것처럼 좋은 얘기를 하고, 상대가 하는 사업 아이템 얘기를 잘 들어준다. 누구누구를 소개해준다는 말도 잘하지만 그게 연결된 경우는 거의 없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이 급하고 도움도 받고 싶으니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하게 되는데 S가 그런 얘기를 듣고 실제 누구를 연결시켜 줬다거나 자기 역량을 동원해 뭐라도 해줬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은 없다.


S가 말하는 건 이런 식이다. '한번 연락해 볼게요, 이런 게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한번 알아봐 드릴게요.' 내 생각엔 그 '한번'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귀에 걸린다. 지나가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언제 밥 한번 먹자. 언제 술 한잔 하자' 해놓고 자리 잡고 앉아 밥 먹고 술 마시며 진지하게 사는 얘기 나눈 사람이 몇이나 되나.


어쨌든 그런 말을 들은 상대방은 자연히 기대를 갖게 되고, S가 먼저 연락을 주지 않으면 이쪽에서 연락을 하게 된다. 그럴 때 S가 하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그게 정말 상대방 회사의 입장인지, 아니면 S가 연락을 하지도 않고 안된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열전에는 수많은 인물과 그 숫자를 넘어서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그 많은 이야기 속에 수시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말과 마음이다.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한다.

-흰 옥에 티는 갈 수 있지만, 말의 티는 어찌할 수 없다.

-세 치 혀가 백만명의 군사보다 강하다.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인다

그냥 얼핏 눈에 보이는 것만 나열해도 이렇다. 


수천 년 전에도 말과 마음,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입이 닳도록 얘기했지만, 사람의 본성은 배워서 익히는 걸 이기는 법이다. 그러니 사람이 듣고 보고 배우며 익힌 진리와 가치에 따라 행동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상대를 잘 관찰하고, 그가 내뱉는 말의 경중을 판단하는 눈을 기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결국 도움이 안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결국 내가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발 한 발 디디는 것이 현실적이다.



참고) 사기열전은 사마천이 쓴 역사서로 본기, 세가, 열전, 표, 서 등 다섯 권으로 구성된 사기의 70%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오래전 정치와 사회를 알려면 로마를 배우고, 인간을 알려면 중국을 배우라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본 거 같은데,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난 후 그게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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