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는 언제 펴지는가
K는 명문대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러나,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내와 상의 후 뉴질랜드로 떠났다.
한국이 싫어서였다고 했다. 무한 경쟁도 싫고, 아이들이 힘들어할 것도 눈에 뻔히 보였다. 가진 게 별로 없어서였겠지만 마음을 먹고 나니 떠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서 할만한 일을 알아봤고, 주말이면 그 일을 배우러 다녔다. 페인트칠이었다.
살던 집이 나갈 때쯤 사직서를 냈고, 짐을 부친다음 비행기를 탔다. 발리에서 일주일을 쉬고, 호주에 들러 며칠을 돌아다니다가 최종 목적지에 들어갔다. 첫 번째 일을 구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후부터는 순탄했다. 일거리가 꾸준했다. 한국에서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24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았는데, 페인트칠을 하면서도 60평이 넘는 2층집에서 살았다.
조금 심심한 거만 빼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내의 생각은 조금 달랐나 보다. 둘째가 중학생이 될 때쯤 아내가 한국행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매일 페인트를 묻히고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속상해서 못살겠다는 게 첫 번째였고, 두 아들을 한국에서 공부시키면 좋겠다는 것이 두 번째였다. 아내가 얘기를 꺼낸 지 6개월 만에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가족 모두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K가 혼자 먼저 들어왔다.
일주일간 머물며 예전 직장에 있던 상사와 친구들, 대학동창들을 만나며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다행히 K의 상사였던 사람이 중소기업-그래도 매출이 천억이 조금 넘었다-으로 옮겼는데, 그 사람과 연락이 닿았다.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던 K의 상사와 만난 후, K는 팀장으로 합류하기로 '빠르게' 결정했다.
K는 출근 후 한 달동안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6년가량 몸 쓰는 일 위주로 하다 보니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만들고, 회의를 하고, 전략을 짜고 한다는 것에 다시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K가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 기존 직원들로부터 받은 첫 번째 견제는 회의시간에 나왔다. K는 자신이 수년 동안 현업을 떠나 있었기에 자신이 잘하기 위해선 주변의 협조와 함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회식자리도 열심히 따라다녔고, 회의시간에도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물론 K보다는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 회의시간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기도 했다. K가 면접과정도 없이 부사장이 느닷없이 데려다 꽂은 사람이라는 것도 다른 직원들이 K를 배척하는데 한몫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K는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점차 발휘할 수준이 되었지만, 회사의 사람들과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매출이 천억이 넘는다곤 하지만 K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다녔던 회사에 비해선 아주 작았고,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준도 K가 보기엔 많이 부족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이후 K는 다른 팀장들과 의견 충돌이 자주 생겼다. 대부분 K가 자기 생각과 화를 참고 누르는 선에서 상황이 종결되었다.
결국 K는 3년 만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기 전 다녔던 대기업으로 돌아갔다. K는 그곳에서 몇 년 후 임원까지 승진했는데, 나는 K가 승진한 이후의 일은 알지 못한다.
K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도 원만해 같이 일하는 아랫사람들은 K를 좋아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다녔던 첫 번째 직장에선 그의 역량을 펴지 못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K는 자주 곤혹스러운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아주 가끔은 치욕스럽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집단의 이기주의라고 표현하면 너무 나간 것이겠지만, 간혹 집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이 우리 집단을 훨씬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저 인간이 우리보다 먼저 올라서서 우리가 가져갈걸 다 가져가는 거 아닌가'라는 정치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능한 표현일 수도 있다.
사기열전의 범저채택열전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끝맺는다. 참고로 범저와 채택은 중국의 고대 전국시대의 인물들로 치욕을 견디고 진나라(우리가 알고 있는 진 시황제의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닦은 인물들로 알려져있다.
한비자는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진실로 옳은 말이다. 범저와 채택은 세상에서 말하는 뛰어난 변사로서 어떤 경우에도 자유자재로 변론할 수 있는 유세가였다. 그러나 각국의 제후에게 유세하여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계책이 졸렬해서가 아니라 유세한 나라들의 힘이 약하고 작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두루 돌아다닌 끝에 진나라로 들어가자 잇달아 경상卿相이 되고 공을 천하에 떨친 것은 참으로 진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의 강하고 약한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선비에게는 역시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사람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도 그 뜻을 이루 지 못한 사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두 사람도 어려운 때가 없었다면 어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K는 머리가 좋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었지만 한국에선 살기 힘들다 생각해 다른 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결국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팔자 좋게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살았다고 편하게 살았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뉴질랜드에서 살았을 때의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그가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K가 한국으로 돌아와 잡은 직장은 그의 능력을 펼 수 있는 수준의 조직과 사람들이 아니었다. 흔히 사람들은 '그러면 너가 능력을 발휘해서 조직을 바꾸면 되잖아'라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아주' 드물다. 훌륭한 리더와 그 리더의 변함없는 지지(참고)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는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K가 돌아와 다녔던 첫번째 회사에서 나름 꿋꿋이 3년을 버틴 것과 전에 다니던 대기업으로 옮겨 자기 능력을 발휘해 임원까지 된 것은, 어려운 일을 겪으며 내적으로 더 탄탄해지고, 예전 직장으로 옮겨갔을때 비로소 자기에게 필요하면서도 몸에 맞는 '소매와 돈'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든 '때'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 듯싶다.
(참고)리더의 변함없는 지지->이에 관해서는 사기열전에 나오는 진나라 무왕과 감무의 '식양의 맹세'에 관한 이야기(사기열전>저리자감무열전)을 찾아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