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게으르다거나 그런 건 아니거든요
도대체 인간은 왜 잠을 자야 할까. 어릴 적부터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건 내가 유난히 잠이 많은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더 어릴 때는 딱히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다들 잠잘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고3 때도 나는 꼬박꼬박 수면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공부에 집중을 못 했다. 그 수면시간이라는 것도 어쩐지 남들보다는 조금 긴 것 같아서 아깝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었다. 어느 위인전을 봐도 잠 많이 자다가 성공한 인물은 없고 다들 세 시간씩만 자고 성공했다는 것 같기에 난 이미 망했구나 싶기도 했고.
그때는 심지어 ‘아침형 인간’이니 뭐니 하는 것이 유행할 때여서, 아침잠이 유난히 많은 나는 굳이 그런 책을 찾아 읽다가 우울해지곤 했었다. 아니 왜 세상은 아침형 인간 위주로 돌아가는 거냐고, 필시 원시시대 때 아침형 인간들이 일찍 일어나 저녁형 인간들을 다 찔러 죽인 게 분명하다는 요상한 농담을 진리처럼 믿으며.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자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러니까 저는 이 명언을 싫어합니다. 제대로 자지 않으면 영영 꿈이고 뭐고 못 이룰 수도 있다구요 엉엉
나이를 몇 살 더 먹고도 잠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막 첫 회사에 입사해서 잘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이 줄어들었을 때는 주말의 대부분을 그걸 보상하느라 보내곤 했다. 12시간씩 늘어져라 자는 건 예사였고 심할 때는 20시간 가까이도 잤다.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한 번쯤 깨서 눈 감은 채 화장실만 갔다 오는 정도. 남들은 평일 저녁과 주말을 쪼개서 자기 계발도 하고 소개팅도 하고 한다는데 집에 오면 자기 바쁘니 (출근하려면 5시 반에 일어나야 했어서 나는 11시에 자도 이미 잠이 부족했다) 영 미래가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잠을 줄일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그럴 수가 없었다. 잠을 덜 자면 안 그래도 낮은 수준인 에너지가 바닥까지 떨어져서 일이고 사랑이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으니까. 원래 내 방 내 침대 아니면 그렇게 깊게 잠들지는 못하는 편인데, 그 당시에는 버스에서 자리에만 앉으면 꿈을 꿔가며 자곤 했다. 가끔은 서서도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 말 다했다. 나로서는 진기한 경험이었고, 그만큼 내가 잠이 부족하다는 걸 반증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회사에서 이직한 이후로는 다행히도 잠을 더 잔다. 회사가 가까워졌고 출근 시간이 늦어졌으며 퇴근 시간이 빨라졌다. 말하자면 워크-라이프 밸런스에서 라이프의 비중이 조금 늘었고 나는 그중 반 정도를 잠을 더 자는데 아낌없이 쓰고 있다. 잠이 부족하지 않으니 다시금 잠자리에 예민해져서, 내 방 내 침대 위가 아니면 영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버스나 택시에서 잠을 자는 일은 아예 없어졌다. 가끔 주말에 신나게 자고 난 날이면 밤에 잠이 안 와 뒹굴거리는 일도 늘었다. 워낙 생각이 많은 편이라 잘못 발길을 들였다간 그 자리에 누워 눈이 빨개지도록 머리만 팽팽 돌리는 일도 있고.
어느 정도는 사치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잠이 충분해지면 자기 계발 같은 걸 하기로 하지 않았나, 생각하면서도 굳이 암막커튼 치고 기어 들어가 이미 충분한 잠을 더 잘 때도 많다. 이미 정신이 말똥말똥해졌음에도 굳이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돌아눕는 일도 많고. 그러니까 더 이상 잠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나는 늘 잠이 고프다. 잠이 주는 그 안락함을 여전히 무엇과도 바꾸지 못하겠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 사람마다 필요한 잠의 총량이 다르다고 하기에 그 뒤로는 그 말을 믿고 있다. 억울해도 어쩌나, 이미 이렇게 태어난 것을. 여전히 누가 ‘저는 네 시간밖에 안 자요’ 하는 말을 들으면 습관처럼 ‘세상에, 크게 성공하시겠네요’ 하고 부러워하긴 하지만 부럽다고 다 따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나를 알고, 네 시간씩 자다간 성공은커녕 금방 어디선가 쓰러져 객사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대신 잠의 총량을 보존하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써 볼 생각이다.(이 문장에서 짐작하겠지만 지금껏 그래 왔다는 건 전혀 아니고 앞으로 좀 더 그래 보겠다는 다짐이다.) 어쨌든 사람마다 필요한 잠의 총량은 다르다니까, 저는 성공이고 뭐고 일단 정상인으로 살아가려면 이만큼은 자야 하는 사람인 것 같으니까, 잠 많다고 게으르다고 다들 눈총과 잔소리는 좀 줄여주셨으면.
살다 보면 필요한 잠의 양이 줄어드는 때가 오긴 할까. 딱히 금방 올 것 같진 않고,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좀 준다고 하니 일단은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때가 되어서 잠이 줄어드는 게 무슨 효용이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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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 밤 나만의 스킬이 있다면 일단 미친 듯이 이어지던 생각의 끈을 딱 끊고, 눈을 감고 똑바로 누워서, 머릿속에 하얀 백지를 하나 띄우고, 천천히 예쁘게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ㅈ, ㅏ, ㄴ, ㄷ, ㅏ. 잔다. 잔다. 잔다. 대충 쓰는 시늉만 하면 안 되고 천천히, 획의 비율을 맞춰서 예쁘게 써야 한다. 중간에 다른 생각이 나더라도 절대 글씨 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마치 글씨 예쁘기 쓰기 세계대회에 나온 사람처럼, 지금 내가 글씨 쓰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 있다. 세상에 그냥도 잘 자면서 이런 스킬까지 써가며 더 일찍 잠들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