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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Jun 08. 2019

언젠가 당신의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황정은 <백의 그림자>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문장은 짧고 간결했으나 읽는 내내 나는 호흡이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 숨 걸러 한 숨, 어떤 따뜻한 것이 조용히 스며들어 깊은 곳부터 내가 차분히 가라앉는 감각. 대체 이 이야기의 무엇이 나를 위로하고 있나 싶었는데 작가의 말을 보고서야 희뿌연 하던 것이 가라앉았다. 이 폭력적인 세계에서, 아무리 바라고 염원해봐도 거칠 것도 없다는 듯 내내 폭력적인 세계에서 내가 포기해왔던 것들, 버려왔던 기대와 믿음에 대해 이 이야기가 다시 빛을 비췄다. 아직은, 이 세계에서도 아직은 좋아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으냐고. 비록 그림자를 뒤에 달고선 허망함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일지라도, 누군가 옆에 남아주는 것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느냐고. 작가는 그만큼의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책을 통해 그 수준의 믿음을 다시 얻게 되었다.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요.



무재라는 사람이 준 것이 컸다. 나와 닮은 곳이 많은 사람이어서 일 테다. 사람 사는 것은 마뜨료슈까처럼 허망하다는 사실에, 가끔은 그보다도 더 허망하기만 하다는 것에 나도 조금씩 물들어 왔다. 사람이 이런 것 때문에 죽는구나, 어째서 저 사람은 저런 일로 먹고살아야 하며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런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걸까, 무심결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의 폭력성이란 끔찍하고 잔인해서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고. 같은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을 테니 아마 타고난 성격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나는 유난했다. 어릴 때는 뉴스 기사 한 줄에도 하루 종일 생각에 사로잡혀서, 저것을 ‘의로운 죽음’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맞나, 저 사람은 어째서 저런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하릴없이 두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하면서 그저 아래로 침잠하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 모든 것이 너무 무거워진 순간 - 혹은 내 그림자가 일어서서 더 이상 남의 그림자 따위 신경 쓸 재간이 없게 된 순간 -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정의란 없는 것, 사람들은 내내 다투고, 세상은 여전히 잘 꾸며진 테니스 코트 같아서 아무도 그 외에는 관심도 없는 것. 그쯤에서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은 더 나아가 그냥 내 그림자에게 나를 맡겨 두었다. 이 잔인한 세상에 어디 사랑이 가능키나 하냐며, 애초에 사랑이라는 게 실재하기나 하냐며. 어차피 서로 다 그림자를 지고 있는 인생,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의 그림자나 잘 달래고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싶었었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무재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무재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폭력적이고 불변하는 실재이며 인생은 너무 허무함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온기를 나눠줄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그림자를 지고서도 손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목이 메어온다고 해도 어둠 속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임을.


안다고 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은 꼭 해보고 싶다. 무재처럼, 그저 옆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숲이라고 해도 누군가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테니. 내 그림자에 대해 노래하듯 이야기하고 나서 따뜻한 국물을 나눠 마시며 꼭 얘기해주고 싶다. 언젠가 네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고. 





사랑하고 있는 모든 이가 읽었으면 하는 소설.
그보다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소설.
비록 등에 지고 있는 그림자가 너무 무겁더라도 우리, 
같이. 




노래할까요.
무재 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 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밭 매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
그렇군요.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라고 말해 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마뜨로슈까는요,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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