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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Nov 12. 2018

제사 대신 미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2018년, 추석



추석 명절 미사를 지내고 왔습니다. 명절에 제사 대신 미사를 드리기 시작한 지 이제 꼭 2년이 되었습니다. 아빠가 없는 명절을 보낸 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단 얘기죠. 십수 년간 꼬박꼬박 지내던 제사를 생략하려니 명절이 영 휑하기는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우리를 깨우던 아빠의 목소리와, 부엌을 꽉 채운 제기들, 매번 봐도 도통 모르겠는 법칙에 따라 준비되던 음식들...... 모든 게 준비되고 나면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위패를 직접 써서 상 위로 올리곤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생각해보면, 떠나는 길에 아빠가 왜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는지 얼핏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그 일사불란한 제사를 진두지휘하던 건 아빠였습니다. 아빠 없이 아빠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건,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도 외롭고 힘든 시간이 되었을 것 같아요. 허둥지둥하느라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하여간 아빠의 뜻에 따라 저희는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대신 천주교 신자인 엄마를 따라 명절마다 위령미사를 드리러 가요. 종교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저는 무신론자에 가깝습니다. 모태신앙이 천주교였던지라 어린 시절 세례도 받았고 정식으로 세례명도 있지만, 머리가 좀 큰 뒤로는 성당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워낙에 의심도 많고 합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어린 시절에도 교리 시간에 툭하면 '말도 안 돼!' 하고 반항하곤 했습니다. 이런 성격은 사실 꼭 아빠를 닮았습니다. 아빠도 종교가 없으셨죠. 가끔 물어보면 나는 여느 신보다는 나를 믿는다며 '나교'를 주창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엉뚱함과 당당함이 좋아 저도 애써 종교에서 멀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렇게 믿음이 없는 제가 어떻게 꼬박꼬박 미사를 드리는 데 동의했냐 하면... 신을 믿지 않던 아빠가 결국은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요.


돌아가시기 5일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전에도 엄마가 몇 번 세례를 권한 적이 있었지만 늘 듣는 척도 안 하던 아빠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다고 합니다. 아빠는 왜 그 마지막이 되어서야 종교를 가지기로 한 걸까요.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이니 지금 세례를 받는다고 신실한 신자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차마 어째서인지 묻지 못했으므로 저는 여전히 그 이유를 모릅니다.. 결국은 그렇게 강인하고 당당하던 아빠도, 어쩌면 생 다음의 순간들이 무서웠던 걸까요. 할아버지가 그랬듯, 또 죽음을 눈앞에 둔 무수한 이들이 그랬듯.  


하여간 저희는 장례의식의 대부분을 천주교식으로 치렀습니다. 그 이후로도 꼬박꼬박 제사 대신 위령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천주교에는 '위령기도' 혹은 '연도'라고 부르는 독특한 기도문화가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안식을 기원하는 내용을 얼핏 한국의 전통 가락과 비슷한 음률에 얹어 노래처럼 부르는 기도입니다. 메기는소리-받는소리처럼 번갈아가며 부르게 되어있기도 하고, 심지어는 '구성지게' 부르라고 되어있기도 한데, 처음 장례식장에서 신자들이 모여 부르는 것을 듣고는 꼭 불교나 유교의 전통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올 때 전통 제사와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 연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기도, 그 반복적인 음은 정말 죽은 이의 넋을 기리는 우리의 곡소리와 닮아있어 저 같은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위로가 됩니다.



'구성지게' 부르라고 되어있는 위령기도의 한 부분.



결국 오늘도 위령미사와 연도까지, 꼬박 한 시간이 넘게 성당에 앉아있다 왔습니다. 신을 믿지 않으면서 열심히 기도문을 외우고 성가를 부르는 건 영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고백하건대 저는 사실 이들의 신을 믿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엄마의 종교를 따르기로 한 아빠의 마음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끄러미 엄마를 쳐다보는 시선, 혹시 당신이 믿는다는 그 신이 정말 저 위에 있으면 어쩌나, 그래서 일평생 신을 믿은 당신은 좋은 곳으로 데려가고, 일평생 의심만 한 나는 데려가지 않아서, 저 위에서 영영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 되지도 않는 짐작을 하는 건 그것이 꼭 요즘의 제 마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혹시나 하는 그 의심을 지우지 못해서, 모순적이게도 신을 믿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이든, 당신들이 어쩌면 갈지도 모르는 그곳에 나도 가야만 하기 때문에.


짧지 않은 위령기도의 끝은 이렇습니다.

주님, (      )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종교가 무엇이든, 모두 어딘가에서 안식을 얻으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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