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화 Sep 20. 2020

요가원에 가고 싶다

어젠 뭘 했냐면요 10: 요가를 '못' 했습니다 


요가원을 그만둔 지도 벌써 3개월이 다 되어간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사실 3월 즈음부터는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다. 집합 금지 명령으로 아예 문을 닫았던 기간도 있고, 문은 열더라도 수련 시간 내내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기간도 있었다. 마스크를 쓰니 안 그래도 가쁜 숨을 더 컨트롤하기가 어려워 자꾸 그쪽으로만 신경이 갔고 동작은 자주 무너졌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공간에서 여러 명과 운동하는 게 실로 부담스러운 시대이다 보니 그렇다고 마스크를 벗을 수도 없었고. 마음의 평정을 찾으러 가는 공간인데 바이러스 하나가 안락함을 모두 무너뜨린 거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가 등록기간이 끝났다. 2년 간 고민 없이 재등록을 해왔지만 이번엔 잠시 물러서기로 했다. 뭐 요가뿐만 아니라 헬스든 에어로빅이든 사정은 비슷하겠지. 어쩔 수 없이 홈트에 익숙해져야 하는, 이른바 코로나 시대인 것이다. 


다행히 유튜브가 있었다. 요즘엔 뭐 거추장스럽게 HDMI 연결하고 할 필요도 없이 스마트 TV로 바로 유튜브를 볼 수 있는 세상이고. 나를 처음 요가의 세계로 인도해 주신 숨 쉬는 고래 부진 선생님의 영상으로 시작하여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여러 요가 선생님을 만났다. 유튜브의 세계는 무궁무진했고 선택권은 넓었다. 집이라고 대충 잠옷 입은 채로 할 수는 없는 법. 요가복을 아래로 잘 갖춰 입고 경건하게 요가매트를 펴고 TV 앞에 앉았다. 조용한 집에 나긋나긋한 요가 선생님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양 손을 모고 나마스떼, 앞으로 한 시간 내 몸에 집중해보자는 말에 마음을 다잡고 의도를 세워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엌에서는 엄마의 칼질 소리가 나더니 곧 찌개 보글거리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가 퍼진다. 거실 구석에서 쪽잠을 자던 강아지는 이상한 동작으로 멈춰있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 총총 발자국 소리를 내며 주위를 돌아다니고, 종국엔 요가매트 위로 올라와 내 다리를 밟고 서선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집중은 금세 흐트러진다. 슬슬 땀이 나기 시작할 때부턴 조금 더 코어에 힘을 주고 에너지를 뻗어야 하는데, 그렇게 스퍼트를 올려 정점까지 가야 하는데. 스퍼트는 어째 화면 속 요가 선생님 혼자 올리고 계신 것만 같다. 엄마가 말을 걸었다거나 강아지가 끙끙 졸랐다는 핑계로 나는 주저앉아 땀을 식히고. 그렇다고 선생님 혼자 계속하시게 둘 순 없으니 일시정지를 누르고.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요가원에선 한 시간 동안 어떻게 이걸 했지 생각하다 매트 위에 드러눕고... 그렇게 맥없이 요가가 끝나버리곤 하는 거다. 


아무래도 나는 의지력 박약이라 홈트랑은 안 맞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번엔 1:1 PT로 잠시 눈을 돌려보았다. 개인 트레이닝이니 아무래도 코로나에 관련된 부담도 적고, 요가를 쉬는 동안 빡세게 근력을 늘리는 데 도움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딱 50분 칼같이 맞춰하는 수업이 영 재미가 없었다. 인상이 찌푸려질 때까지 근육을 쪼이다가 잠깐 쉬다가, 또 같은 동작을 열 번 반복하고 쉬다가. 그렇게 진행되는 한 시간이 그냥 얼른 끝나길 바라는 마음밖에 없었다. 그래도 요가를 통해 운동에 꽤나 재미를 붙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엄청난 오산이었다. 나는 단순히 운동으로서의 요가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물론 내 부족한 근력과 유연성을 보강해주는 운동으로서도 충분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분명히 요가엔 그 이상이 있었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글쎄, 일상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해야 할까. 


요가원은 회사에서 집에 오는 길목에 있었다. 하루의 에너지를 내 것 같지 않은 회사일에 대부분 소진하고 터덜터덜 돌아오던 길, 굳이 한 번 더 힘을 내어 요가원에 들린다. 3층에 가까워질수록 진해지던 특유의 향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며. 선생님과 인사하고 들어서선 챙겨 온 요가복으로 갈아입는다. 전 시간이 끝나고 환기 중인 수련장으로 들어선다. 조도를 최대한 낮춰 어두컴컴한 수련장 양 끝엔 촛불 두 개가 일렁일렁. 오른쪽 구석에 내 요가매트를 펴고 앉는다. 핸드폰은 바로 방해금지 모드로 바꿔 수건과 함께 옆으로 쭉 밀어놓는다. 그때부터 약 한 시간, 요가매트 위에 앉은 나는 오늘 하루의 모든 잔여물로부터 안전하다. 어떤 연락이나 알림도 매트 위를 넘어오지는 못한다. 


수련이 시작되면 그 단절을 전제로 집중력을 모아야 한다. 본격적으로 동작을 시작하기 전의 짧은 명상에서, 선생님은 언제나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으로 모든 주의를 모아야 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신다. 그러니 사실 나는 오늘 하루뿐만 아니라 과거의 상처나 미래에 대한 걱정, 평소라면 쉬지 않고 귓가에 짹짹거릴 그 모든 사념들로부터 멀어진다.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다. 물론 가끔은 생각이 멋대로 흘러 오늘 있었던 회의나 내일 준비해야 할 일로 가닿기도 하지만, 깨닫자마자 다시 내 몸으로 가져온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작을 위해 온 몸의 에너지와 밸런스를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이 적어도 그 부분을 도와준다. 딱 한 시간뿐이라도 그렇게 모든 일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이 순간 움직이는 내 몸에만 집중하는 경험. 수련이 끝나면 굳어있던 몸이 풀어진 것과는 별개로 마음도 가벼워지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 그 덕일 테다. 


내가 그리운 건 바로 그런 경험이다. 바깥의 소음과 내면의 소리를 모두 차단한 채 나에게 집중하는 한 시간. 그러니 오랜만에 가본 PT샵이 대리 충족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벽면의 대형 TV에선 소리 없이 뉴스가 팽팽 돌아가고, 스피커에선 요즘 유행하는 케이팝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잠깐씩 쉬는 시간이면 PT선생님은 이런저런 내 일상에 대해 묻고. 1:1로 받는 코칭이니 운동으로서는 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내가 원했던 건 운동 그 자체가 아니었던 거다. 거기선 무엇으로부터도 단절될 수가 없었다. 






코로나 시대의 모순은 거기에 있다. 재택근무와 집콕으로 생활 반경이 완전히 집으로 한정되어버린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일상과의 단절이 간절해졌는데 더 이상 요가에 갈 수 없고 운동까지 집에서 해야 한다는 것. 내 일상의 과제들과 여러 소란이 그대로 널려있는 집에서, 가족들도 저마다의 일상을 유지하느라 늘 시끌벅적한 집에서, 요가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오롯이 마련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요즈음의 밤엔 피곤함에 지쳐 침대에 누워도 유난히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특히 오늘 있었던 업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지나칠 정도로 이어진다. 워커홀릭도 아닌데 왜 이러지, 의아해하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도 같았다. 겨우 침대에서 30센티 떨어진 책상에서 몇 시간 전까지 그 업무들에 매달려있었으니까. 퇴근길에 요가원에 들려 훌훌 털어내지도 못하고 겨우 요만큼 몸을 옮겨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으니까. 업무에서부터 늘어진 끈을 여직 줄줄이 달고서. 1미터 떨어진 거실에서 요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집에 갇혀서는, 아무것도 끊어낼 수가 없는 거다. 


연초에 다쳤던 무릎의 염증이 재발하여 요 며칠은 전혀 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요가 매트를 펴고 앉아도 그저 상체 스트레칭 수준의 운동만, 그것도 아니면 폼롤러를 갖다가 근막 이완이나 조금 하는 정도. 운동을 못한다고 답답해했던 적은 평생에 없었던 것 같은데. 요가를 전혀 못하는 것이 어째 서운하고 울적하다. 향내만이 진하게 나는 고요한 곳에서, 내 숨소리와 떨림에 집중하며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던 순간이 너무나도 그립다. 요가원에 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