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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니 Nov 12. 2020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화성이라.. 이 선생은 먹구름을 옮겨놓은 얼굴을 하고서 교과서 앞뒤 페이지를 계속 뒤적거린다. 과학 내용이 영어 지문에 나오는 건 군대에서 축구 차는 얘기 듣는 괴로움과 같은 레벨이잖아. 우리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안드로메다행을 선사하겠군.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는 마음을 다잡는다. 해야지 뭐. 별 수 있나. 


특성화고에 부임한 지 언 8개월째. 험난한 등반을 시작하는 산악인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이제는 적응할 법도 한데 여전히 이 선생은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를 하루 한번 외치며 교문을 나선다. 오늘도 수업 시간에 NASA(나사)를 설명하다가, Martian(마션)을 설명하다가, Oxygen(산소)를 설명하다가 '선생님, 근데 그것들이 저와 무슨 상관이죠?' 하는 눈빛들과 마주쳤다. 이 아이들은 영어 단어에 도통 관심이 없다. '당신이 화성에 대해 알고 싶은 15가지'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었다. 나만 알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마션 요약본을 보여주었다. 아주 잠깐 관심을 보이다가 다시 '선생님, 이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눈빛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나는 어느 영어 교육학자가 힘주어 강조하던 학생의 흥미를 끌어올리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 망한 것 같다. 


한때 영어가 전 국민의 관심사였던 적이 있다. 'English Fever in  Korea'가 여러 매체의 이슈가 되면서 조기교육 열풍이 몰아치고 영어로 전 교과를 강의하는 몰입식 교육이 곧 들이닥칠 것처럼 영어, 영어 하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정규과정에 영어가 들어오자 교육열 높으신 엄마들은 일치감치 다른 길을 모색했는데 방학 때마다 단기 해외연수를 보내거나 미국에 있는 친척집에 보내는 식으로 아이들이 직접 Native English를 습득하게 하고 부족한 부분은 국내 영어학원을 통해 보충했다. 한글도 서투를 것 같은 아이가 네이티브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사례가 엄마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성공 스토리가 구전처럼 떠돌았었다. English Fever는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구글과 파파고의 등장, 수능 영어 절대평가로 인해 영원히 절대적일 것 같았던 영어의 막강 파워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영어는 이제 해외 취업과 유학에 필요한 도구일 뿐 일상의 사람들은 캡처-변환 기능만 익히면 만능 해결사 구글과 파파고가 1초 만에 번역본을 만들어내니 어렵게 외우고 읽고 공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이 아이들에게 영어가 필요한가 싶다. 세계화 시대에 글로벌하게 소통하기 위해 영어는 필수라고, 17년 전 임용고사 면접 시험장에서 영어의 필요성을 묻는 면접관의 질문에 이선생은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 이 선생 눈앞에 있는 이 아이들은 글로벌 시대에 소통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어가 필요하다고 하면 또 어떤 눈빛을 보여줄까. 아직은 꿈도 없고 의욕도 없고 핸드폰 세상이 주는 자극에만 반응하는 이 아이들에게, 필요하면 알바를 해서 돈을 벌고 귀찮으면 쉽게 포기해버리는 이 아이들에게 영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엔 설득력이 너무 부족하다. 이 아이들의 눈 앞의 세계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글로벌 월드가 아닌 것이다. 일부의 이야기일 것 같지만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영어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English Fever는 이제 특정 부류의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통용되는 말이 아닐까. 


contents를 설명하다가 이 선생은 다시 한번 혈압이 오른다. 콘텐츠란 말 많이 들어보지 않았니? 우리말에서도 많이 쓰이잖아. 콘텐츠. 이게 저 영어 단어야. 아~~ 그래. 그래. 들어밨지? 콘텐츠 뜻이 뭘까? 몰라요. 아 의미를 몰라? 궁금하지 않았어? 콘텐츠가 뭔지? 아뇨. 안 궁금했는데요.. 

하.. 거.. 참.. 심한 거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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