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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

by 소화

오늘도 교실 안은 소란스러웠다.

조금만 이해해주면 좋을 텐데, 조금만 기다려주면 좋을 텐데, 아이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서운함은 곧장 목소리가 되어 터져나오고, 억울함은 울컥하는 말이 되어 서로를 겨냥했다.


“네가 잘못했어.”

“왜 나만 그래?”


서로를 탓하는 말들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한 명 한 명, 찬찬히 바라본다.


참 예쁜 아이들이다.

맑은 눈빛,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조심스럽게 내미는 손끝까지.

그런데 왜, 서로에게 그 예쁨을 보여주지 않으려 할까.


마음을 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마음을 받아줄 사람에 대한 믿음이 약할 때는 더더욱.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작은 감정을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뤄주기를, 받아주기를, 안아주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번번이 모른 체 당하고, 때로는 상처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겪으면, 아이들은 스스로 문을 닫는다.

“아플 바엔 차라리 먼저 닫아버리자.”


아이들은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

서툴게 다투고, 서툴게 삐치고, 서툴게 벽을 쌓는다.

그래서 오늘 아이들의 소란도,단순한 미성숙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


충분히 돌봄받지 못한 마음,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시간들, 그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려 애쓰는 아이들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조급해진다.


“왜 아직 이토록 서툴까.”

“왜 아직도 서로를 아프게 할까.”


하지만 그런 조급함 역시, 결국은 어른의 몫이다.


기대하고, 절망하고, 근심을 키우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 곁에 서 있는 우리 어른들이다.


조용히 책을 펼쳤다.


오늘, 내 마음을 일으켜줄 문장을 찾아 간다.

“아이는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 기대하고 절망하며 근심 보따리를 키우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인 것 같아요.
어른의 슬픔과 절망이 아이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닐지,
그러니 아이들과 지내는 우리가 아이의 진심을 왜곡하거나 놓치지 않도록,
불필요한 것을 전하지 않도록 애써야 겠어요.” (심은보, 여희영. ‘ 오늘도 학교에 갑니다.‘ 64쪽 중)

책장을 덮고, 오랫동안 가만히 생각했다.


아이들은 오늘 하루도, 자기만의 속도로, 자신을 지키고, 살아내고 있었다.


비록 서툴고, 비록 삐거덕거려도,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작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살아내려는 것.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고 싶어서 손을 내미는 것.

그 모든 게 애쓰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문제 없다. 아이들은, 충분히 잘하고 있다.

어른들이 느끼는 답답함, 아쉬움, 조급함. 그것은 어른 스스로의 마음 챙김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서툴게 살아내는 하루를, 조급함 없이, 조용히 기다려줄 것.

돌봄받지 못했던 시간까지 이해하며, 아이들이 다시 마음을 열 수 있도록 기다릴 것.

조심스럽게 다짐해본다.


오늘 하루도,아이들은 서툴게 웃고, 서툴게 다투고, 서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툴게나마 조금 더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그 곁에, 비빌 언덕처럼 조용히, 묵묵히 서 있다.


마음속으로 다정히 속삭인다.


“괜찮아. 오늘도 네가 살아낸 시간은 그 자체로 충분히 빛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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