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 집에도 있습니다 ‘이과남자‘

이과남자와의 맥주 숨바꼭질

by 소화


모든 게 만족스러운 토요일 밤이다.

중요한 일정이 있던 오늘이었지만 기다리던 독서 모임 ‘깊이 있기 모임‘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보고 싶던 책 벗들과의 이야기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닌 봐야 할 것 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확하게 보는 삶도 끌어안을 조금 더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


저녁을 먹으며 신랑은 들떠 있었다.

“오늘 밤엔 뭐 하지.” 역시나 직장인의 토요일밤은 누구에게나 꿈같은 시간이다.

아이와 무엇인가 작당하는 것 같더니 어벤저스 영화를 처음부터 보기로 했다고 한다.

세상 짠돌이인 남편이 OTT에 가입을 했다고 한다. 한 달 동안 모든 시리즈를 아이와 섭렵하고 해제한다고 한다.

아이와 행복한 추억을 만들겠다는 그의 계획에 자비로운 눈빛으로 응원을 보냈다.

‘돈 나가는 지갑은 당신일 테니까, 나는 다 괜찮다…‘


두 남자는 신이 나서, 노트북을 켜고 침실이 있는 방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영화 관람모드에 들어섰다.

곧이어 ‘우다다다다‘. 요란한 소리가 방을 뚫고 나온다.

“소리 좀 줄여.”


어! 잠깐, 이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대사인데?

스쳐가듯 분명히 어디에선가 나온 장면이다.

지난 연휴에 읽었던 조이아 작가님의 ‘이과남편의 아름다움‘에서도 같은 장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이과남자‘라는 것이 어쩌면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보통명사였던 것일까?

어쩜 이렇게 복사, 붙여 넣기 하듯 같은 반응으로 일관되게 우리는 대응할 수 있는 것일까?

가만 보면, 이 30평이 넘는 집의 겨우 작은 방 하나에서 영화 좀 보겠다고, 사운드를 켠 것인데.

그 작은 방 외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누리고 있는 나란 사람 하나는 그 소리마저 용납을 못하는 것이다.

문득, 책의 그 부분이 다시 읽고 싶어 져 책을 펼쳐보았다.


마치 우리 집 이야기가 그려있는 듯 똑같다. 똑같다. 이어져 나오는 남편들의 이야기도 역시나 똑같은 반응이다.

“그럼 난 먼저 잘게.”


나는 배운 여자이고, 책 읽는 여자이니까 오늘은 내가 먼저 아량을 베풀기로 하고 주섬 주섬 읽고 싶은 책을 챙겨 내 방으로 들어왔다.

소리를 선택적으로 듣는 이과남자는

‘우다다다다다‘ 정신없는 소리 가운데에서도 내가 맥주 한 캔을 따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듣고 나온다.

“맥주 마시려고? 또 있어?”

“없어! 이거 딱 한 캔 남았어. “


거짓말 순 거짓말이다. 아까 헬스하고 들어오면서 여섯 캔 사 와서 딤채에 숨겨 놓은 것은 모를 테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 그이지만, 이미 우리 집 이과남자는 모든 것이 스캔되었을 것이다.

내가 헬스를 마치고 들어오던 순간부터 손에 들린 정체 모를 쇼핑백과, 갑작스러운 냉장고 정리 (실은 짱박음)

두 남자를 방으로 몰아넣은 것.

그리고 절대 한 캔에서 끝낼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아는 그이니까.

지금쯤 적당히 아이와 영화를 보면서 어떤 타이밍에 나와서 맥주를 한 캔 마실까 계산이 끝났을 것이다.


그는 말하지 않지만, 내가 숨긴 맥주가 어딘지 안다. 정확히 안다.

심지어 몇 캔 남았는지도 머릿속에 암산으로 넣고 있는 듯하다.

내가 마트에서 몇 캔 사 왔는지, 지난주에 몇 캔 소비했는지,

냉장고 용량과 각도와 기압 변화까지 감안해서 “지금 이 여자, 하나 숨겼다”는 걸 통계적으로 추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묻지 않는다. 찾지도 않는다. 모른 척한다.

이게 제일 소름이다.


하루는 내가 야심 차게 숨겨둔 맥주를 밤 11시에 꺼내 마시고 있었는데, 그가 지나가다 한 마디 툭 던졌다.

“아, 결국 그거 마셨네. 오늘이겠구나 했어.”

“… 뭐?”

“네가 이틀 전부터 뚜껑 안 닫히는 반찬통 넣은 거 보고 느낌 왔지.”

“… 봤으면 말을 하든가.”

“왜? 마시라고 남겨둔 건데.”


이과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수치와 예측을 기반으로 한다.

말로 표현하진 않지만,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통제한 뒤, 나의 패턴을 파악해 그 타이밍에 ‘침묵’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 침묵은, 어쩌면 그의 최상의 표현 방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그를 이겼다고 착각한다.

“숨겨놓았지요~”, “이건 나만 아는 거야~”, “이번엔 절대 못 찾아!”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왜 숨겼는지도, 그걸 마실 타이밍이 언제인지도. 그러면서도, 절대 티 내지 않는다.


그 무심한 듯한 배려는 마치

“널 위한 내 계산은 이미 끝났어. 넌 그 안에서 자유롭게 흔들리면 돼.”라는 메시지 같다.


어쩌면 나도 안다. 그가 일부러 내 맥주를 안 마시는 거라는 걸.

내가 마시고 나서도,

그는 슬쩍 냉장고 아래 서랍에서 ‘비상 캔’을 꺼내는 걸 몇 번이나 봤다.

(그걸 보고도 내가 모른 척하는 이유는, 자존심이다.)


결국, 이 게임은 서로 모른 척해주는 은근한 사랑싸움이다.

나는 맥주를 숨기고, 그는 내가 숨겼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놔두고,

그러면서도 그 순간 내가 기대는 작은 위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결정적인 순간엔 딱 맞춰 한 캔을 꺼내주기도 한다.


그 모든 계산을 사랑이라 부르긴 민망하지만, 그래도 오늘도 나는, 냉장고 문을 열며 속으로 묻는다.

“오늘은… 그가 놔뒀을까?”


그리고 맥주 한 캔이 거기 있다는 걸 발견할 때마다

나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숨겼든, 그가 일부러 숨겨뒀든.


그 작은 알루미늄 캔 하나 속에 우린 오늘도 조용히,

서로를 계산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참 잘 살고 있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툰 말 너머, 같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