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 지쳐 사는 아이들이 많다.
우리집 아이만해도 그렇다.
그런데 그 학원에 한번이라도 가보는 게 꿈이었던 아이도 있다.
우리 반 호돌이가 그렇다.
어제부터 처음 태권도 학원에 다니게 되어 설렘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는
오늘 아침, 도복을 입고 등교했다.
교실 문을 열며 “태권!” 하고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얀 도복 위로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반짝였다.
“우와~ 멋지다. 정말 멋지다.“ 인사치레 건네는 말이 아이는 정말 밝게 빛났다.
드디어 입고 싶은 옷을 입고, 가고 싶은 곳을 가게 되어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무더운 날씨에 옷 두벌을 껴입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날씨가 더우니 이제 벗어두자는 나의 말에도
아이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 멋진 도복이 더러워 질 것 같은데. 어쩌지?”
아이는 마지못해 옷을 벗었다.
나는 아이가 벗어놓은 도복을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정성껏 개었다.
아홉 살, 어린아이가 누려야 할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기쁨이
이토록 간절하고 귀한 일이구나 싶어서.
나는 아이를 성장하는데 있어 입고, 먹고, 자는 가장 기본적인 돌봄은 해줄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 곁엔,
기꺼이 손 내밀고, 눈 맞추고, 기다려주는
좋은 이웃들이 있다.
오늘 저녁, 구역모임에서 루카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의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 말씀이 오늘따라 가슴에 오래 머물렀다.
지나쳐 간 사제와 레위인,
무언가 더 중요해 보이는 이유들 앞에서 멈추지 못한 발걸음들.
그리고 아무 연고도 없던 사마리아인의 멈춤.
그의 손길은 누군가의 생명을 다시 세우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의 사랑이었다.
돌봄을 온전히 건넬 수 없더라도
“여기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있어요.” 그 말 한 마디를
기꺼이 세상에 외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를 대신 부를 수 있는 사람. 누군가의 아픔을
조용히 품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이웃 하나가 아이의 삶을 바꿔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자라나는 길목에서
어떤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돌봄을 온전히 주기엔
나도 삶에 허덕이며 사는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 곁에 “이 아이에게 관심이 필요해요”라고
세상에 외칠 수 있는 한 사람이 될 순 있지 않을까?
상처를 직접 싸매주진 못해도,
기꺼이 누군가에게 이 아이의 존재를 알리고,
다른 손을 이끌 수 있다면.
그것도 사마리아인의 길이 될 것이다.
결국,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은
‘더 가까이 가 보아라’는 부르심인지도 모른다.
삶을 멀리서 바라보지 말고,
먼지 나는 길가로 나와 함께 걸어보라는 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