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가의 열두달 , 9월 이야기를 읽고
새 달의 첫날, 나는 늘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을 펼친다.
오늘은 특히 몇 문장 사이에서 오래 머물렀다.
“뻣뻣하고 생명 없는 물질의 적대감과 냉담함”(155쪽) 을 말하는 대목에서,
내 머릿속엔 한 아이, 또 한 아이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가만히 등을 굽힌 어깨, 질문이 닿을 때마다 살짝 뒤로 물러나던 발끝,
웃음을 삼키는 입술. ‘자기방어의 몸짓’이라는 말이, 그들의 마음을 대신해 준다
그 뻣뻣함은 “나 좀 봐 달라”는, 상처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았던 시간과 어른들의 말이 누적되어 마음에 굳은살이 박힌 탓일지도 모른다.
냉담해 보여도 사실은 다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방어.
그렇게 만든 건 결국 우리 어른들이었다는 사실앞에서 나 또한 고개를 들 수 없다.
.“내켜하지 않는 존재를 한 뼘 한 뼘 파고 들어가 그 안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생명이 얼마나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지.” (155쪽)
나는 교실의 작은 장면들을 떠올렸다.
아침, 연필이 부러져도 혼나지 않는 시간. 숙제를 빈칸으로 가져와도
“괜찮아, 오늘은 네 이야기를 먼저 들을게”라고 말할 수 있는 여백.
친구의 말이 빠르게 질주할 때, 따라잡지 못한 아이에게 속도를 맞춰주는 손짓.
실패해도 안전한 자리, 약속이 지켜지는 일과, 기다려주는 침묵.
흙에서 무언가를 ‘앗아오기’보다 더 많이 ‘돌려주어야’ 한다는 문장에, 나는 오늘 내가 무엇을 돌려주었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눈길을 돌려주었는가.
말의 안전을 돌려주었는가.
시간의 권리를 돌려주었는가.
한 뼘 한 뼘. 흙은 그렇게 부드러워진다.
처음에는 삽의 이가 튕겨 나갈 만큼 단단하던 땅도, 기다림과 물과 햇빛을 나눠 받으면 결을 바꾼다.
아이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왜 이렇게 굳었니?” 하고 다그치면 더 굳는다.
“여기, 네가 뿌리내릴 만큼의 여분을 마련해 두었어” 하고 말을 걸면,
아주 늦게, 아주 조심스럽게, 뿌리의 흰 선이 보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덜 말하고 더 듣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모든 흙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157쪽).
모든 아이는 저마다의 리듬으로, 저마다의 빛깔로 자란다.
어떤 아이는 규칙을 좋아해 표지의 색이 조금만 바뀌어도 불안해하지만, 또 다른 아이는 변주를 사랑해 같은 방식이 하루만 반복되어도 지루함에 갇힌다.
어떤 아이는 긴 설명 속에서 안정을 찾고, 또 다른 아이는 두 문장의 단호한 신호가 있어야 비로소 움직인다.
누군가는 눈맞춤이 먼저여야 하고, 누군가는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기척만으로도 충분하다.
흙의 물성에 따라 물 주는 법이 달라지듯, 아이의 결에 따라 돌봄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서둘러 속단하지 않으려 한다. “구제불능”이라는 말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교실의 언어를 두려 한다.
“지금은 겨울을 오래 보낸 흙일 뿐이야.” “물길을 한 번 잃었을 뿐이야.” “이 결에는 느린 물이 어울려.”
이렇게 이름을 바꾸면, 우리의 몸짓도 달라진다. 꾸짖음 대신 관찰, 평가 대신 기록, 지시 대신 제안, 추궁 대신 초대.
아이가 움츠러든 자리엔 자리를 한 칸 물려주고, 아이가 멈춘 길목엔 표지판 대신 잠시 앉아 쉬어갈 의자를 놓아 본다.
쉬어도 괜찮다는 허락이 뿌리를 더 멀리 보낸다는 걸, 나는 올해 따라 더 자주 배운다.
돌려준다는 건, 사실 어른의 품을 조금 비워 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계획의 거칠고 큰 덩어리들을 부수어 아이의 한 줌을 담을 수 있게 만드는 일.
내 말의 장식을 걷어내 아이의 한마디가 더 머물 자리를 만드는 일.
내 옳음의 경계를 낮춰 아이의 다름이 넘어올 수 있도록 흙둑을 낮추는 일.
그렇게 비워 낸 만큼, 흙은 부드러워지고 아이는 깊어진다.
“앗아오기보다 더 많이 돌려주자”는 다짐이 교실 문턱에서 구호로 끝나지 않도록, 나의 작은 수첩에 ‘기다림’을 적어 넣는다.
두려움이 앞설 때가 있다.
한 뼘 파고들었지만, 여전히 단단한 층을 만났을 때. 그래도 알겠다.
씨앗은 어둠을 밀어내며 자라고, 뿌리는 저항을 느끼며 방향을 배운다.
어른의 일은 그 과정을 방해하지 않는 것, 다만 스며들 수 있는 조건을 오래, 꾸준히 마련하는 것이다.
조건이 곧 사랑이라는 말을, 나는 요즘 흙에게 배운다.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9월, 교실의 계절이 바뀐다. 다시 또 마음을 다잡는다.
오늘도 ‘빼앗지 않고 돌려주는’ 수업을 할 것.
오늘도 ‘단단함을 흙으로’ 되돌리는 어른일 것.
아이의 마음에 흰 뿌리 한 줄이 보이면, 나는 알아차리자.
우리가 함께 한 뼘 한 뼘, 흙이 되어 왔다는 것을.
그리고 조용히, 더 많은 빛과 물을 건네자.
그게 우리가 아이 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정원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