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애착인형을 잃어버렸다
아이와 남편이 둘이서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금쯤이면 비행기를 탔겠구나, 생각하던 찰나,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 비행기 탑승 완료. 아끙이 잃어버림. 오열 중.
큰일났다. 나는 보통 놀라운 소식에는 당황을 하는데, 이 소식에는 그런 나마저도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아끙이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 옆에 있었던 토끼 인형이다. 아이의 이모, 그러니까 내 동생이 태어날 조카를 위해 일찌감치 장만해 준 것이었다. 뽀얗고 하얀 천에 까만 눈, 주황색 바탕에 하얀 땡땡이 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었는데, 조그마한 입이 시큰둥하게 닫혀 있어서 자꾸 안아주게 되는 인형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 인형을 옆에 놓아주었다. 그때는 아이의 눈에 뭐가 들어올 시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인형이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이가 뒤집고 기고 걷고 말이 트이자, 아이는 '아끙, 아끙' 하며 토끼 흉내를 냈다. 내가 '깡충, 깡충' 하는 것을 따라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아이에게는 '깡충' 발음이 어려웠는지 한동안 우리집 토끼 인형은 '아끙, 아끙'하며 뛰어다녔고, 결국 그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아끙이는 늘 아이 옆에 있었다. 잘 때에도 아이는 다른 인형은 다 제쳐두고 아끙이만 찾았다. 시간이 더 흐르고 아이가 여물어가면서 아이가 아끙이와 보내는 시간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그럼에도 자기 전에는 늘 아끙이를 찾았다. 몇 번의 여행을 함께 갔고 외가에도, 친구네 집에도 늘 함께 갔다.
그러는 사이 아끙이는 많이 닳았다. 무지한 엄마가 별 생각 없이 세탁기에 넣어 돌리는 바람에 더 빨리 해진 것 같기도 하다. 원피스에 달려 있던 단추가 하나 떨어졌다. 다시 달아주겠노라고 약속을 해 놓고는 또 까먹었다. 그러는 사이 아끙이는 자꾸 자꾸 닳고 있었다.
이번 설 연휴였나. 친정에 가는 길에 아이는 마지막으로 아끙이를 챙겼다. 그 바람에 엄마가 아끙이를 보고는 깜짝 놀랐는데, 그제야 살펴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낡아 있었던 것이다. 자주 만지는 얼굴은 곧 터질 것만 같았고 팔 한쪽도 튿어져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바느질로는 안될 수준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겠노라 말을 하고는 연휴 끝에 집에 돌아와 몇 번의 바느질로 급한 불은 껐다.
그렇게 가느다랗게 생명을 연장해오던 아끙이가 사라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문자를 받고 나서부터 사실 나도 안절부절이었는데, 보통 때 같으면
- 그러길래 잘 챙기랬지! 아예 가져가질 말든가!!
라고 혼을 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미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혼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을만큼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나는 그냥 안아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 잘 시간이 다 되어서 아이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끙이가 없으니 옆이 허전했다. 혼자 공항에 남아 있을 아끙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간신히 달래 재웠지만, 당장 내일이 또 걱정이다.
걱정대로 아이는 아침부터 눈물 바람이었다. 아이고 어쩌니, 속상해서...라는 한탄의 말 밖에는 해줄게 없다. 이런 아이를 보며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 다른 인형을 사주겠다고 할까
- 헤어질 때가 되었으니 헤어진거라고 말해줘야 하나
- 갖고 싶어하던 닌텐도를 사서 달래줘볼까
하지만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뭐랄까, 아이에게 닥친 어마어마하게 슬픈 일들을 온 몸으로 겪어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심각한 감정을 외면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면, 그 감정은 나중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찾아온다. 그러면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 감정에 당하게 된다. 나는 아이가 지금 이 감정을 오롯이 느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달랠 길을 찾던 아이는 아끙이에게 편지를 썼다. 아무래도 아끙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큰 모양이다.
그리고 종이를 접고 그림을 그려 아끙이의 액자도 만들었다.
이건 아이만의 애도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다시 울먹이는 아이를 보며 나는 결국 말을 꺼냈다.
- 새로운 아끙이를 사는 건 어때?
그 말에 남편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보탰다.
- 그래. 아끙이 너무 낡았잖아. 더 낡아서 터지고 뜯어지기 전에 헤어진 게 오히려 좋은 걸 수도 있어.
말없이 고민을 하던 아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새로 산 토끼 인형도 결국 아끙이 일거라고, 아끙이의 영혼이 담겨서 널 만나러 올거라고 설명했고, 아이도 그 설명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아이와 남편은 모두 알고 있다. 아끙이는 떠났고, 사라졌다.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아이는 발걸음 가볍게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제주도 지역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한 통 받는다. 공항분실물센터였다.
- 혹시 잃어버리셨다는 인형이 아주 많이 낡은, 주황색 빛바랜 원피스를 입고 있는 토끼 인형인가요?
- 네 맞습니다!!!!
아끙이를 찾았다. 그 순간, 솔직히 나는 거짓말을 할까 생각도 했다. 아끙이와 간신히 헤어졌는데, 다시 만나게 되다니. 이 다음 이별은 또 어떻게 치러야 하나. 이미 낡아버린 아끙이. 조만간 터져서 더 이상 토끼가 아닐지도 모를 아끙이.
하지만 나는 그 거짓말도 꾹 눌러 놓고, 아끙이를 착불 택배로 받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다. 아끙이와 어떻게 헤어져야 할지.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 가족은, 누군가 아이에게 애착 인형을 사준다고 하면, 꼭 두 개, 아니 세 개를 사 놓으라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