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다시 왔다. 꽃은 피고 바람은 부드러워졌고, 사람들은 그 계절을 오래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걸었다. 풍경은 분명 달라졌는데, 나만 아무것에도 닿지 못한 채 계절의 바깥을 떠도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가 잠든 곳으로 가는 길. 차로 다섯 시간도 넘게 걸렸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창밖을 바라봤다. 터널이 끝나면 산이 이어지고, 산이 끝나면 다시 터널이었다.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콘크리트 틈새로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는 멀리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따라왔다.
차 안은 조용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수가 줄었다. 마음의 문이 반쯤만 열린 것 같았다. 유쾌한 이야기는 멀게 느껴졌고, 진지한 이야기는 입에 닿기도 전에 스러졌다. 결국 라디오를 틀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적당한 간격으로 침묵을 덮어주었다.
“오늘 하늘 참 예쁘다.” 남편이 말했다. “딸 편히 오라고, 아버님도 참….”
그 말에 아빠 마음이 겹쳐 보였다. 그렇게 나를 생각해 주었을 마음이 지금에 와서야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입술이 잠깐 달싹이다 멈췄다. 나는 그저 하늘만 바라봤다. 그 마음은, 더는 들을 수 없는 말이 되어 가슴에 오래 머물렀다.
바닷가 가까이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었다. 아빠가 계신 자리는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다. 잔잔한 파도 소리, 발밑에 깔린 고운 흙, 그 위로 스며드는 햇빛.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인데, 막상 서보니 낯설었다. 아빠가 왜 이곳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소란스럽지 않게 마음을 품어주는 바다였다. 그 풍경 앞에서 마음에 담아둔 장면들이 떠올랐다. 손에 든 국화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두 손을 모았다. 결국 입에서 나온 건 한마디였다.
"아빠, 나 왔어."
이어서 나올 말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전하고 싶은 말들은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흩어져 있었고, 그중 많은 것들은 끝내 말이 되지 않았다. 말보다 침묵이 더 진심을 닮았다고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무엇을 더하려는 마음보다,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부인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의 방이 떠올랐다. 아빠가 떠난 뒤 처음 그 방을 정리하던 날, 서랍 속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흐릿한 흑백 사진이었다. 웃고 있는 젊은 여인의 얼굴. 아빠의 엄마, 내게는 할머니였다. 아빠는 그 사진을 꺼내 보며 마음을 달랬을까. 아니면 자꾸만 아려서 꺼내지 않으려 애썼을까. 알 수 없었지만, 사진을 보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지금쯤 아빠도 할머니 곁에 함께 있겠지. 어디든,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얼굴과 마주 앉아 편히 쉬고 있기를.
파도가 천천히 밀려오던 그곳, 아빠의 고향. 잔잔한 물결처럼 아빠도 어딘가에 고요히 머물러 있을까. 보고 싶던 얼굴들과 마주 앉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무거운 마음을 다 내려놓진 못했더라도, 그 바다처럼 한결 편안했으면 좋겠다. 더는 외롭지 않기를. 바람 부는 날엔 따뜻한 햇살 아래 앉아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기를. 나는 매일 마음속으로 바란다. 아빠가 그곳에선 아프지 않고, 그리운 이들과 오래도록 평안하기를.
아빠는 늘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나는 그 마음을 끝내 다 돌려드리지 못했다. 너무 늦게 배운 마음이란 자꾸만 아프다. 바보처럼 이제야 아빠를 생각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래도 아빠는 그런 나를 여전히 좋아해 주시지 않을까. 예쁜 우리 딸이라고, 늘 그렇게 불러줬으니까.
오늘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덜 무거웠다. 아빠를 두고 오는 길이 아니라, 아빠의 온기를 마음에 담고 돌아가는 길 같았다. 잠시라도 곁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마음을 다독였다. 나는 여전히 서툴고 자주 흔들리지만, 아빠는 지금도 어디선가 나의 하루에 발을 맞춰 함께 걷고 있을 것만 같다.
아빠, 나 왔어요. 그리고 또 올게요. 당신을 잊지 않으면서, 그리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나를 지키며 살아갈게요. 언젠가 다시 당신 앞에 서는 날, 지금보다 단단하고 따뜻한 모습이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게요. 마음속 당신과 함께 꾸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