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흔적을 남겼다

by 소현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결핍을 품고 산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도 친구 관계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공부나 꿈, 경제적 여유 같은 다른 영역에서 허기를 느끼기도 한다. 결핍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결함이 아니라, 살아가다 보면 피할 수 없이 스며드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어릴 때 나는 그 결핍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형편이 기울수록 집은 조금씩 더 작은 곳으로 옮겨갔고, 벽이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함께 움츠러들었다. 남자친구가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면, 괜히 역이나 버스정류장처럼 집과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홀로 그 거리를 걸을 때면,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조차 문을 다 열어주지 못하는 내 마음이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마음이 발끝에 작은 돌처럼 걸려, 짧은 길이 끝없이 길게만 이어졌다.


아빠의 직업을 설명하는 일은 늘 목구멍에 걸렸다. 학교 서류의 ‘부모 직업’ 칸 앞에서 빈칸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누군가 “아빠는 뭐 하셔?”라고 묻는 순간은 늘 숨이 턱 막혔다. 이름을 묻듯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그 가벼운 질문이, 내게는 거짓말을 준비해야 하는 신호였다.


어린 시절 가장 부러웠던 사람은 사촌언니였다. 언니는 여름이면 작은아빠와 작은엄마와 함께 캐리비안베이에 갔고, 고맙게도 나를 그 자리에 끼워 주곤 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곧장 파도타기 구역으로 달려갔다. 시원한 물결이 밀려올 때마다 언니와 나는 소리를 지르며 깔깔 웃었고, 물보라 속에서 한참을 놀았다. 그러다 언니가 물을 먹기라도 하면, 작은아빠와 작은엄마가 금세 달려와 괜찮냐며 챙겼다. 같이 웃고 놀던 한가운데에서, 나에겐 없는 그 장면이 유독 선명해 마음이 저릿했다.


계절이 겨울로 바뀌면 스키장에도 데려가 주었다. 언니는 장비를 모두 갖춘 채 능숙하게 슬로프를 내려왔고, 나는 배운 적이 없으니 멀리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다 타고 내려오면 함께 어묵 국물을 나눠 먹었다. 눈 속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언니와 나란히 서 있는 시간이 나에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 따뜻함 속에서도 닿지 않는 세계가 있었지만, 그 시절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한 기억 중 하나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멀고 반짝였다.


그때의 결핍은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구멍 같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지 않으려 애쓰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결핍만으로 채워진 시간은 아니었다. 바쁜 부모님에게서 받지 못한 시간을 작은아빠와 작은엄마, 그리고 언니를 통해 받기도 했다. 부러움과 서운함 사이에, 따뜻하게 스며드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온기가 있었기에 나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여전히 세상을 좋아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 구멍은 흉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선과 모양이 되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핍이 있었기에 사소한 표정 속 숨은 의미를 읽을 수 있었고, 짧은 순간도 오래 붙잡아 둘 수 있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어떤 일의 무게를 알기란 어렵다. 결핍은 나를 ‘안다’의 자리로 이끌었다. 사랑이 모자랐던 사람은 사랑이 필요한 순간을 먼저 알아보고,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인정이 주는 힘을 안다. 상실을 겪어본 사람은 남의 상실을 가볍게 말하지 않는다. 아픔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다시 다치지 않으려는 마음을 만든다. 어떤 이는 결핍을 반복하지만, 어떤 이는 그 길을 피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조심하는 마음, 그 결은 아픔 속에서 길러진다.


결핍은 이해라는 언어를 남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는 힘, 그게 결핍이 남긴 귀한 선물이다. 흔적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붙잡고 버텨줄 힘이 자란다. 결핍은 단순히 어둠만을 품지 않는다. 그 속에서 숨을 고르고, 아주 천천히 빛을 향해 피어나는 꽃을 품는다. 그 꽃이 피기까지 지나온 길고 느린 시간, 거친 계절과 매서운 바람을 기억하기에, 다른 사람의 꽃이 움트는 속도를 감히 재촉하지 않는다.


결핍은 여전히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이 내 안에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그 골짜기가 누군가의 고통이 머물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결핍이 남긴 가장 단단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흔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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