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현 Jan 11. 2022

소녀이자 가장의 삶

멈추지만 않으면 결국 어딘가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 해 꼭 n천만원을 모아야지. 결심을 한 당일 저녁 아빠께 연락이 왔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딸 자니.” 평소와 다름없이 답장을 하다가 전화를 거니 집주인이 전세를 빼달라고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사를 가야 하는데 주변에 알아본 집 중 가장 저렴한 집으로 가더라도 지금 전세금에 2500만원을 더 보태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융통이 되겠냐는, 애둘러 전달된 질문에 괜찮은 척 우스갯소리를 해 아빠를 안심시켰습니다. 그 연락을 하기까지 얼마나 마음 졸이셨을까. 슬픈 목소리로 “아빠가 돈 먹는 하마네.” 하시길래, “노노, 돈 먹는 하마가 아니라 밥 먹는 아빠예요. 당뇨 관리 잘 하시구요.” 하니 그제야 웃으셨습니다. 마이너스 통장 대출을 알아보다가 글을 씁니다. 사실은 그 뒤로 기운이 쭉 빠졌습니다.

 

  제가 가장이 된 이유는 얘기하자면 길고도 짧습니다. 아빠의 이혼, 그 뒤, 삼촌의 학대, 그 뒤 뒤, 아빠께서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심장이 멈췄습니다. 그래서 집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왔었는데, 기적적으로 되살아나셨습니다. 보험도 없으셨고, 유일한 가장의 엄청난 상해와 후유증으로 우리 집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어른들 말로는 할머니께서 바로 집 안의 귀중품을 모두 가지고 삼촌과 어딘가로 가버리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린이의 기억일 뿐입니다. 아빠께서는 꽤 오래 중환자실 생활을 하셨고, 일반 병실로 옮겨지신 뒤에는 왜인지 저와 오빠가 아빠 곁에 함께 지냈습니다. 집이 없어져서 그랬나. 아빠께 여쭈어 봐야겠습니다. 우리 두 남매를 환자 침대에 재우고 환자인 아빠께서 보호자 침대에서 주무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집도 잃었고, 재산도 잃었고, 아빠의 건강까지 모든 걸 다 잃었습니다. 아빠께서 재기하지 못하실 것으로 여겼던 친척들이 모여서 오빠와 저를 고아원에 보낼 지 협의했습니다. 우리 남매 앞에서 말입니다.


  다행히 아빠께서는 퇴원하게 되셨지만 우리 가족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아빠 택시 회사 동료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반지하 방을 구해주셔서 그 곳에 살았습니다. 아빠께서는 너무나 절망하셨고 한동안을 술로 보내셨습니다. 매일 아빠 술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미성년자에게도 아빠 심부름이라고 하면 술을 팔았습니다. 아빠 드릴 약주 주세용. 하면 주셨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제가 아빠 술을 사다 드리고 술병을 다시 가게에 갖다 드리고 했습니다. 회복은 더디었고 아빠께서는 혼자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셔서 누군가 등을 밀어 일으켜드려야 했습니다.


  절망에서 간신히 벗어나신 아빠께서는 국가에서 나온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으로 우리 남매를 열심히 키우셨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용돈도 없었고, 옷도 오빠에게 매번 물려받아 입거나 나중에는 중고 매장에서 싸게 나온 옷을 사거나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크면서 점점 창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은 참 삶 곳곳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편하기만 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이 사람을 주눅들고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학교에서 반장네 어머니께서 햄버거를 돌린다고 할 때 주변 아이들은 마음껏 신나했지만 저는 무뚝뚝하게 앉아있었습니다. 그 것에 들뜨는 모습을 보고 제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챌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급식비 지원을 받는다며 저에게 거지새끼라 놀려대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때의 저는 유약했고 한 마디 대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그 사람 인스타그램이 연관으로 떠서 들어갔다가 간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냅다 다이렉트 메시지로 나를 기억하냐 물으니 모른다고 하길래, 그가 초등학교 때 저를 괴롭혔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사과를 받았으나 진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과는 받았습니다. 간호사가 되시니 환자에게는 그러지 마세요, 라고 했고 차단당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자라던 저는 깨닫습니다. 오빠가 답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빠는 적당한 인문계고를 진학했고 적당한 성적에 하고 싶은 것도 목표도 없어보였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닌다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상상되지 않았고, 그 모습에 강렬한 위기감을 느낀 저는 빨리 취업을 해야겠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학교가 마이스터 고등학교였습니다. 고졸로 삼성에 들어갈 수 있다고? 솔깃해서 담임선생님께 이 학교에 진학하겠다 말씀 드리니 그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께서 저를 뜯어 말리셨습니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 갑자기 공고를 가겠다고 하니 모두가 뜨악해 하셨습니다. 허나 제가 강경히 설득했고, 담임선생님께서는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생소한 곳이지만 좋은 학교라는 사실을 아시고 난 뒤 입학 전형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학교에서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입사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게 고모부가 다니던 회사(고모가 그렇게 떵떵거리던 고모부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들어오게 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더 오래 살면 더 볼 일이 많을 테니 오래 살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중학생 소현의 촉은 적중해서 오빠는 스물 아홉까지 방황을 하다가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갔습니다.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돈을 다 보내 부양하고 용돈을 받아 쓰던 저도 정신을 차리고 경제적 독립을 한 상태이고, 가족들에게는 매 달 일정 생활비를 보내 드리는 중입니다. 집에서 완전히 독립하거나 오히려 지원을 받기도 하는 다른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시작지점이 훨씬 뒤에 있다고 느끼니, 속이 쓰린 때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 해서 가족을 나몰라라 하기에는 우리가 함께 으쌰으쌰 견뎌온 오랜 세월이 있으며, 무엇보다 저는 가족들을 매우 사랑합니다. 소녀가장이면 뭐 어떨까요, 멈추지만 않으면 결국 어딘가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어디든 괜찮다고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전 03화 삼촌 머리 책으로 때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