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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Aug 21. 2020

박아나의 일상뉴스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

 연일 쏟아지는 확진자 소식에 여름휴가다 뭐다, 잠시나마 느꼈던 일상의 소중함을 또 한 번 절감한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일상의 정의가 바뀌어 버린 건가 하는 조바심도 난다. 줄줄이 취소하고, 취소되는 약속들, 예측할 수 없는 내일... 이제는 이런 게 일상인가. 뭐 이러다 말겠지, 9월 초면 괜찮겠지, 라는 긍정적인 마음과 백신이나 치료약이 나올 때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교차한다. 그렇다고 맨날 이런 생각만 하고 살기에는 우울해 피하고 싶지만, 자꾸만 울리는 긴급재난문자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코로나 블루일까. 부쩍 의욕이 떨어지는 기분이다. 나름 코로나 일상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나 보다. 뉴스를 봐도 슬프고, 인터넷을 봐도 슬프다. 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도 슬프다. 어디 멀리 해외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대단한 욕심도 아니고, 마음 통하는 지인들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은 소박한 마음을 눌러야 한다. 슬픈 일이다. 이제 그치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내린 비도 슬픔을 더했다. 슬프고 우울한 마음에 위로가 필요해서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을 꺼내본다.


 “슬픔을 토로하라. 그러지 않으면

  슬픔에 겨운 가슴은 미어져 찢어지고 말 테니.”


  슬픔을 아주 잘 이해했던 셰익스피어는 이런 믿음을 맥베스에서 던컨 왕의 아들 맬컴의 대사를 통해 아주 분명하게 표현했다. 셰익스피어는 참고로 지금의 우리처럼 페스트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에 태어나 탄생의 순간부터 슬픔과 슬프게도 연결돼 있었다. 그가 태어난 해, 고향인 스트랫퍼드에서 영세를 받은 유아 63명 가운데 60명이 사망했다. 그렇게 우울하게 시작된 인생이라 그런지 셰익스피어는 평생 슬픔에 익숙했을까. 그는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와 아들을 둘 다 잃은 큰 슬픔도 겪었다. 슬픔을 토로하라. 그런 그의 말이기에 더 가슴으로 와 닿는다.


 토로하라. 맞는 말이다. 우리에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슬픔을 마음속에 계속 품을 수만은 없다. 그러기엔 세상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힘들 땐 힘들다고, 슬픈 땐 슬프다고, 소리 내서 말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책에서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타인과 나누라고 한다. 정말 힘든 경우에는 심리 치료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 같은 때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른다. 모든 것들이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마스크 너머로 마음의 소리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까.  


 소리 내서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다면 글로 쓰는 방법도 있다. 감정을 종이에 써서 현실화하는 과정에 대단한 힘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런 힘을 느끼고 있었기에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험 삼아 써보라. 노트를 집어 들거나 컴퓨터를 켜고 쓰기 시작해 보라. 그렇게 쓴 것은 누구에게 보여줄 필요도 간직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가장 효과적인 글쓰기 방법이 무엇인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눴다. 카페로 가라. 되도록이면 자주 찾는 카페는 피하라.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서 고통스러울 만큼 정직한 말을 써라. 다 쓰고 나면 종이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려라. 그것으로 끝이다. 그때쯤이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끝났을 테고,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은 모두 표현했을 것이다.


처음 가 본, 이런 낯선 카페에서라면 가능할까. (바다만 보다 한 줄도 못쓸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가 체질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2년 넘게 이곳에 글을 써왔던 나도 내 감정을 아주 솔직하고 정직하게 글로 표현하라고 하면 머뭇거릴 것 같다. 자물쇠를 채워가며 나만의 비밀일기를 썼던 중학교 때 잠깐을 제외하고는 늘 누군가가 내 글을 들여다보았다. 고통스러울 만큼 정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글로도, 아니 말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책에서는 글로 어렵다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예를 들어 혼자 있는 차 안에서, 숲 속을 걸으면서 슬픔을 큰 소리로 토로하라고 조언한다. 사실 이 책에서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같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잃었을 때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을 주로 이야기한다. 헤어 나오거나 극복하기 힘든 그런 슬픔들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표현처럼 가슴이 미어져 찢어지고 말 그런 슬픔들. 이렇게 엄청나게 무거운 감정들을 뱉어내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겠지. 이런 감정들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들은 피할 수 있는 한 가장 최선을 다해 피하고 싶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가슴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도 그리 편하지 않다. 마음 약한 나는 이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곱씹는 일은, 그것들이 남의 이야기일지라도, 마음이 찢기는 것 같았기에. 그래도 결국 이 책을 꾸역꾸역 다 읽고 나니, 묘하게 위안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아픈 삶을 들여다보니 그렇더라, 정말. 나쁜 일은 왜 내게만 반복적으로 일어나냐고 불평했지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날들도 반성한다. 모두가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도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고, 헤쳐나가야 할 슬픔이다. 심지어 내게만 일어난 고통도 아니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그렇게 서로에게 혹은 내 자신에게 위안을 건넬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나의 오늘에게 위안을 보낸다.

책과 커피 한 잔도 조금의 위안이 된다. 사진 :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지음,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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