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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Aug 24. 2018

포르투갈 여행 1탄

 그래도 명색이 여름휴가인데... 여행지에서 글을 쓸까 말까 무척 망설였다. 다녀와서 쓰는 글과 여기 포르투갈에서 쓰는 글의 느낌이, 아 그놈의 느낌이 분명 다를 것임을 알기에 일단 글을 쓰기로 했다. 평소에는 노트북에 글을 바로 썼는데, 이번에는 생각나는 대로 다이어리에 적었다. 나중에 돌아가서 노트북에 잘 정리해서 옮기면 되니까.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지에서 노트에 남겨놓은 글들을 다시 쓰면서 두 가지 장점을 발견했다. 그때 여행지에서의 감성이 살아나 아직도 여행 중인 것 같고, 한 주 쉬고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기다 보니 설레기도 한다. 감성과 설렘, 이 두 가지 감정은 누구에게나 여행이라면 떠오르는 단어일 텐데, 이번 여행에서 나는 얼마나 느끼고 설레었을까.


 리스본. 직항으로는 갈 수 없는 곳. 비행기 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한번 갈아타야 한다는 점이 리스본을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세계사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건지, 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많이 졸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포르투갈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잘 모르는 곳이다 보니 나름의 환상이 생겼고,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했는데, 이렇게 오긴 왔네. 오기 전에 공부를 좀 하고 싶었지만, 처리하고 올 일들이 많아서 생각만큼 시간이 나지 않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영화로 보고, 리스본행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는 정도가 준비라면 준비랄까. 지식보다는 감성적인 면으로 접근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이후에 펼쳐질 빡빡한 여행 일정 속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감성 칸에 탑승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좁고 울퉁불퉁한 리스본의 골목, 약간의 지저분함은 덤.
밖에 널어놓은 빨래 색만 봐도 우리와 색감은 다른 것 같다.

 구불구불한 골목들 사이로 달리는 트램과 울퉁불퉁한 돌바닥 길, 너무 고운 파스텔톤의 건물 색, 그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빛바랜 아줄레주 타일,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들. 이국적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 꽤 낯선 풍경이 리스본의 첫인상이다. 일단, 분위기 파악을 위해 일종의 탐색전으로 리스본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첫날은 툭툭 -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관광용 소형차량-으로 관광지들을 빠른 시간에 섭렵했다. 툭툭은 오르막길도 거침없이 올라가고, 가이드처럼 약간의 설명도 곁들여 주니 편하긴 했다. 1755년 리스본 지진 때 도시의 7,80 퍼센트가 다 붕괴됐다고 하는데,  지금 이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집들과 잔잔한 테주강을 내려다보니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알 수 없는 마음의 허기를 채우고, 재빠르게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흠, 근데... 짧은 시간 안에 여기저기 다 돌아보는 것은 좋은데, 뭔가 부족하다. 그래, 그게 빠졌네. 길을 좀 헤매도, 다리가 아프고 힘들어도, 내발로 직접 걸어 다니는 자유가 그립다. 물론 리스본의 언덕들을 오르내리는 건 보통일이 아닐 테지만.

툭툭을 타고 달렸던 리스본 거리.

 첫날 툭툭으로 다녀보니, 다 보지 못하더라도 보는 만큼만 보고, 그만큼만 느끼면 될 뿐이라는 평범한 교훈을  오랜만에 깨닫는다. 어차피 다 볼 수는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서울을 다 돌아본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보지 못한 곳은 인연이 아닌 것으로 쿨하게 생각해야 한다. 예전에는 여행책에서 안내한 관광지를  웬만큼 다 돌아야 제대로 여행한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덜 보더라도 조금 쉬어가는 게 좋다. 여행객이지만 여행객이 아닌 것처럼  현지인의 일상을 잠시라도 느끼는 게 더 즐겁다. 어디로 갈지 정해지지 않았지만 이 골목, 저 골목을 요리조리 누비다가 우연히 맞닥뜨리는 사람들과 풍경이 마음을 움직이니까. 마음의 준비 없이 만났기에 더 반갑고 멋지다.

우연히 걷다가 만난 멋진 풍경, 액자 같아요.

 어차피 내가 원해서 온 곳이니, 내가 원하는 데로 방향을 잡는 게 맞겠지 싶어 리스본에서의 짧은 일정을 쪼개어 이틀은 근교를 다녀왔다. 여행 속 여행이라고 해야 될까. 여행 가서도 거기서 어디론가 떠나는 맛이 다르다. 그렇다면 한 번 떠나볼까. 기차로 40분이면 닿는 거리에 대서양 바다가 기다리고 있고, 산속 요새 같은 곳에 동화 같은 궁전이 있다. 리스본의 영혼,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서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카스카이스를 다녀오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테주강과 대서양이 만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노을 지는 저녁에 본다면 어떨까, 기차가 잠시 설 때마다 보이는 작은 해변 마을들에 한 번씩 들러보면 어떨까, 여기 카스카이스에서만 한 일주일 지내면 어떨까 상상하면서, 무척이나 흐뭇해졌다.

카스카이스에만도 해변이 여러개 있다.  동네 사람들과 리스본에서 온 사람들이 어우러져 해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신트라의 페나성. 사진으로 봐도 독특하죠?

 바다를 바라보며 충분히 쉬었으니 좀 걸어야겠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신트라로 떠나본다. 마뉴엘 양식이라는 포르투갈 특유의 화려한 스타일과 그 당시 유행하던 많은 양식들이 혼합되어 지어진, 그러니까 그 당시 유행의 최첨단인 페나성은 동화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자태다. 페나성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피해,  무어인의 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무어인의 성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강한 바람과 약간의 고소공포증을 감수해야 하는 나름 험난한 코스였지만,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날아갈 듯 가벼워진 나를 발견했다. 물론 몸은 아니고, 마음이. 지금 나와는 달리, 그 옛날 보초병들에게는 적이 어디서 들어올지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을 피곤한 자리였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속 어느 집에 따뜻하게 몸을 숨기고 싶은 충동을 누르면서 그렇게 매일같이 이 자리를 지켰겠지.

무어인의 성을 오르다 뒤돌아보니 이런 풍경이...

 다시 버스를 타고 마을로 내려와 헤갈레이라 별장을 방문했다. 이곳의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곳은 이니시에이션 initiation 우물, 이름은 우물이지만 우물로 사용된 적은 없고 주술적인 목적으로 만든 곳이라고 한다. initiation이라는 뜻 자체가 종교적 신비에의 입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가. 탑처럼 생긴 이 우물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아래에서 위로 내려다보니 음침한 가운데 신비롭다. 우물의 바닥까지 내려와 보니 지하 동굴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기괴한 암석들을 보며 조심스럽게 어두운 길을 통과하고 나면, 작은 폭포와 개구리밥 비슷한 게 잔뜩 낀 연못이 나타난다. 그 색이 어찌나 인공스럽게 느껴지는지 연두색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더 헷갈리네. 이게 진짜 연못인가 싶어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고맙게도 앞에 가던 어린이가 손을 뻗어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나에겐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탈출하고 싶은 느낌이... 헤갈레이라 우물 바닥에서 위를 바라본 모습.
진짜 연두색 물감으로 칠한 것 같지 않나요?  연못 맞아요. 빠지면 연두색 물이 들라나...

 산타후스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가서 리스본의 야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나흘 동안의 리스본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아마데우가 제일 좋아했다던 아우구스타 거리와 아치, 거기서 이어지는 코메르시우 광장과 드넓은 테주강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번에 못 간 상 조르제 성은 다음에 오를 것을 기약하면서 리스본과는 작별이다. 좁고 울퉁불퉁한 돌길로도 부족해 오르막과 내리막길로 끝없이 이어지는 리스본의 거리들은 언젠가 꿈에 나올 것 같다. 특히 하이힐로는 절대 걸을 수 없는 리스본의 돌바닥에 새겨진 모자이크 같은 패턴도 함께 떠오르겠지. '칼사다 포르투게사'라고 불리는데, 포르투갈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에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아마데우가 다녔다는 코임브라 대학의 보도에도 지혜를 상징하는 모습의 돌조각 패턴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다니는 길바닥에도 의미를 부여한 옛날 사람들의 세심함에 놀란다. 그리고 그 바닥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어서 좋다.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아서.

칼사다 포르투게사. 보기엔 예쁜데, 여기에 힐이 끼이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리스본 다음 여행지인 포르투의 렐루 서점에 가서 깨달았다. 페르난두 페소아. 그의 자취를 놓쳤다. 그의 생가도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휑하고 지나치고 말았다. 돌아와서 바로 반성하는 마음으로 그의 책을 읽고 있다. 시차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의 불면의 밤을 지켜주고 있고 '불안의 책'. 불면이지만 불안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뒤늦게 리스본의 영혼을 느끼고 있다. 테주강에서 super bock 맥주 한 잔 하던 순간이 그립네.  그때 불던 강바람과 무어인의 성의 산바람이 떠오르는 태풍이 지나가는 밤이다.

산타후스타 엘리베이터에서 바라본 리스본 풍경. 해지기 직전...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생각이 더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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