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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Aug 10. 2018

리스본행 야간열차 탑승을 앞두고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도 시작된다. 여정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말을 툭하고 던질 날이 올까.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아마데우가 자신의 책에 쓴 이야기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아마데우가 글을 쓰는 장면.  사진:네이버

 이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였을까. 리스본에 꼭 가보고 싶었다. 언덕길에 트램이 인상적인 포르투갈의 수도. 그러고 보니, 축구 영우 호날두의 나라라는 것 외에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영화 속 포르투갈, 리스본의 이미지는 내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스위스 베른에서 온 낯선 남자에게 숨겨왔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주고 곁을 내주는 모습이- 서로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참 훈훈하다. 영화 속 설정일지라도, 왠지 포르투갈 사람들은 정이 넘치는 따뜻한 사람들일 것 같아... 주변에 다녀온 사람들에 따르면, 포르투라는 곳도 그렇게 아름답다고 한다. 리스본도 충분히 멋진 곳일 텐데, 포르투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꼭 가보라고 추천하는 것인지 궁금증만 더해갔다. 그러다  '비긴 어게인'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유럽의 곳곳을 누비는 꽃할배를 보고도 담담하던-담담하려 애쓰긴 했다- 나를 “비긴 어게인”이 제대로 흔들 줄이야. 평소 좋아하는 가수들의 버스킹하는 모습도 신선했지만, 어느 순간 그들의 목소리 뒤에 녹아있는 배경에 더 빠져들기 시작했다.  저기가 아니었다면 저런 감성이, 그런 노래가 나올 수 없었을 거야... 그곳은 리스본이었고, 포르투였다. 그래, 이제 정말 떠나볼까.

비긴 어게인2, 리스본에서 버스킹하는 모습. 사진:뉴스24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은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다. 가보지 않은 곳이지만 대강의 동선을 머리 속에 그려 넣어야 전체적인 틀이 완성된다. 말이 완성이지, 현지에 도착하면 돌발 상황이 흔하게 일어난다. 물론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여행의 속성이고 매력이긴 하지만. 일단, 시간의 여유가 넉넉지 않아서 리스본과 포르투에만 있기로 했다. 포르투갈 남부 쪽에 해안이 절경인 곳이 많아 욕심이 났지만, 사진으로만 감상하기로 하고.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하고, 리스본에서 포르투까지 이동하는 기차표까지 끊고 나니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다. 리스본과 포르투 시내의 지도를 검색하고 꼭 가봐야 할 곳들의 위치를 확인한다. 아직 가본 적이 없는 나라지만 마치 다녀온 것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요즘에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지명을 검색해서 지도를 보지만, 예전에는 종이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도시를 찾고, 길도 알아냈다. 그런 식으로 어릴 때는 지도 위 세계 여행을 많이 다녔었는데, 지금도 항공사 책자 뒤편에 있는 세계 지도를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 수단, 에피오티아, 세네갈, 탄자니아, 앙골라.... 이렇게나 나라가 많구나. 미국 시애틀에는 언제 가보나, 시카고도 아직 못 가 봤는데... 다음의 여행을 기약하기도 하고, 어쩌면 평생 가보지 못할 곳을 이렇게라도 대신 다녀오는 것처럼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포르투갈 남부 Algarve 지방. 사진으로만 만나요! 사진: 포르투갈관광청

 여행 전 설렘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다시 봤다. 낯선 여자가 다리 위에서 떨어지려는 것을 막은 교사, 라이문트. 그녀는 홀연히 사라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그녀의 빨간 코트와 책 한 권뿐이다. 그리고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의 이 책에는 리스본행 기차 티켓이 들어있었다. 말 그대로, 동공지진을 경험한 라이문트는 학교 수업도 내팽개치고 그 책에 담긴 이야기를 쫒아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떠나는데... 과연 그는 그 책을 쓴 아마데우를 만날 수 있을까. 


 영화의 줄거리야 이미 본 영화니까 알고 있었지만, 곧 리스본에 간다고 생각하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리스본에서 그가 묵었던 silva 호텔은 실제로 있을까. 그가 셔츠를 산 pitta라는 양복점이 있는 아름다운 거리는 어디쯤일까. 안경점에서 일하는 여인과 식사한 곳은 어딜까. 여행 가서 영화 속 장소들을 우연히 마주치면 엄청 반가울 것 같아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그레고리우스가 묵었던 숙소는 알파마 지구에 있다고 한다~ 사진: 씨네21

 포르투갈의 역사도 궁금하다. 역사를 알아야 그 나라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총리. 무려 36년간의 독재정치를 감행했고, 식민지와의 끊임없는 전쟁과 산업화를 막는 저개발 정책을 고집하여 나라 경제를 도탄에 빠트린 사람이다. 자신의 독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우민화 정책을 실행하였는데, 그 결과 국민들의 문맹률은 40%에 달했다. 영화 속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아마데우와 친구들이 비밀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글을 가르치는 수업으로 위장하는 부분이 있다. 그 옛날 야학 같은 느낌의 이 장면, 이제 이해가 간다. 독재자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살라자르의 말년은 꾸며내도 이렇게 꾸며낼 수 없을 정도로 어이없다. 휴가기간에 실수로 떨어져 머리를 세게 부딪친 그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 새로운 총리가 독재정권을 이어받는다.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다시 의식이 돌아온 살라자르에게 측근들은 뒤탈이 두려워 새로운 총리가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그냥 총리 대우를 해준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가족도 없이 사저에서 은둔 생활을 했던 살라자르는 측근들이 갖다 주는 가짜 신문을 믿고, 가짜 보고서에 서명하며, 가짜 총리 직을 수행했다.  결국 죽는 순간까지 그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죽었다는데, 본인이야 누릴 거 다 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야 조롱과 비야냥만 나올 뿐이다. 살라자르가 국민들에게 시행한 우민화 정책이 결국 본인에게서 큰 결실을 맺은 셈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 살라자르가 유일하게 좋은 영감을 준 건 작가 조앤 롤링에게였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악명 높은 기숙사를 만든 창립자의 이름이 살라자르 슬리데린인데, 바로 살라자르 총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사실 조앤 롤링은 포르투갈과 인연이 깊다. 포르투에서 포르투갈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해리포터 이야기도 거기서 쓰기 시작했으니까. 포르투의 카페에서 조앤 롤링이 글을 쓴 것처럼 여행 중에 여유가 있다면 글을 쓰고 싶다. 조앤 롤링의 영감의 힘이 나에게도 쏟아지기를 바라면서. 여행에서 얻은 영감이 내 글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거라 믿으면서.

카페 마제스틱. 조앤 롤링이 많은 영감을 받으면서 글을 쓴 곳. 사진: Majestic cafe 홈페이지. 

  여행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포르투갈로 향하는 긴 비행의 동반자는 영화의 원작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이다. 예전에 사두고 묵혀 놓았던 책인데, 이번 여행을 위해서 기다렸던 게 아닐까. 영화로 만난 리스본과 책으로 만날 리스본은 느낌이 다르겠지. 그리고 내가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할 리스본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영화 속 아마데우의 말처럼 자신을 향한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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