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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Jul 13. 2018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영감이었다

 4년 전, SBS 뉴스에 출연해 "톡톡 튀는 영감이 어디에서 나오냐?"는 질문에 악동뮤지션 이찬혁은 “제 머릿속에 예쁜 할머니를 꽃단장시키고 모셔다 놓으면 영감이 오시더라고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동생인 이수현은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웃음을 터뜨렸고, 질문을 한 앵커는  별다른 반응 없이-아마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다소 난감했을 것 같다-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영감의 또 다른 의미를 이용한 언어 유희식의 대답이 엉뚱하긴 하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는 게 영감이니까, 이 대답만큼이나 영감도 엉뚱하긴 하다는 면에서 뭔가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재 군복무중인 찬혁군. 군생활에서도 많은 영감을 찾길. 사진:마이데일리

 나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사랑이라는 주제로 노래를 만들어보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먼저, 나의 사랑이나 이별의 경험을 돌아보겠지. 나의 경험들로도 부족하다면 친구들의 옛사랑 이야기도 떠올려보고, 사랑 이야기를 담은 책 속의 주인공들,  가슴 절절한 영화 속 장면들도  모아 본다. 이런 식으로 나의 혹은 남의 경험들을 돌아보고 헤집어보다 보면,  아! 하고 영감이 떠올라 어느덧 가사 한 줄이 쓰이고,  음표가 그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흔한 주제의 노래도 뭐라도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말할 거리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영감을 위해서는 알맹이, 경험이 필요하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어도 좋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들여다본 것이어도 좋다. 책이나 영화를 통한 간접 경험도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직접 경험한 것보다 훌륭한 알맹이가 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으니 어떤 형태로든 알맹이는 필요하다. ‘예쁜 할머니를 꽃단장시키면’이라는 조건을 말한 걸 보면, 찬혁 군도 영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영감을 이끌어내는 알맹이, 경험. 이 경험은 다양하기만 하면 영감이 확보되는 건가?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경우나, 새로운 분야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경험이 다양하지 못할 텐데, 그럼, 영감도 잘 떠오르지 않을까? 글쎄... 여기서 놓친 것은 경험의 다양성 못지않게 중요한 경험의 깊이다. 내 관심사가 한결같거나 지속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 데서 오는 그 경험의 깊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영감의 세계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다. 그 깊은 세계에 아직 발도 디뎌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 나도 그렇다. 경험의 폭이 넓지도, 깊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인 나는 여전히 영감에 굶주려 있다. 혹은 쌓아온 경험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법을 잘 모르거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게스트 출연을 앞두고 이 애매한 상황 속의 나는 뭔가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 필요했다. 인터넷 검색도 하고, 책도 읽어 보지만 제자리걸음이다.  편히 들었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도 편치 않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영화를 볼까? 가볍게 영화부터 시작해보는 거야. "말할 수 없는 비밀" 이 좋겠군. 못 치는 곡이 없다는 피아노 왕자에게 도전한 전학생 상륜의 피아노 배틀 장면을 보면서 가슴 떨렸었지. 이 영화라면 나를 영감의 세계로 무사히 데려다 줄 거야. 그런 기대를 가득 품고 영화를 보다 보니, 문제의 그 피아노 배틀 장면에 이르렀다. TV에 빨려들 것처럼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숨죽이고 몰두한다. 쇼팽의 흑건 백건 연주 장면도, 쇼팽의 왈츠를 모티브로 편곡한 것을 듣고  더 빠른 속도로 받아치는 상륜의 즉흥 연주 실력은 여전히 멋졌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10년 전에 봤을 때만큼의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배틀곡인 두금삼-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이 떠오르는 곡-을 왼손으로만 연주하는 상륜. 사진 :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중에서 캡쳐.

 그 사이 나는 뭐가 달라졌을까? 세월이 흘렀고, 내 감정이 무뎌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여전히 잘 웃고, 잘 우는 나를 보면 감정이 그렇게 무덤덤해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뭘까? 그래... 그거였다. 나는 이 영화를 순수하게 즐기지 못했다. 영화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이 부분에서,  대단한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오로지 그 목적에만 꽂혀 있었다. 마치 동생이랑 숨은 그림 찾기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피아노 배틀 속 영감 찾기에 몰두했다. 상륜과 샤오위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비밀'이란 말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샤오위가 연주한 곡의 이름, 상륜 아빠가 하는 일, 피아노 배틀을 한 이유라는 질문에는 서로 비밀이라고 대답하지 않았군. 체크 포인트야.

실제로 피아노를 잘 친다는 주걸륜과  다시 봐도 예쁜 샤오위역의 계륜미. 사진 :이코노미21

 영화는 싱겁게 끝났다. 예전에는 감동적으로 봤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 영화를 보고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었는데,  즉흥 연주에도 도전해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영감을 얻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냥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면, 마치 아이처럼 신기해 할 수 있고, 감정도 더 풍부하게 느껴지는 일들이 뭐라도 하나 건져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보니 딱히 감흥이 일지 않았다. 영감 대신 짠한 생각만 든다.  비평가의 일은 피곤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늘 이면에 무엇이 있을지 정확히 따져보고,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다 보면, 온전한 기쁨을 편안하게 누리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비평가는 되지 않으련다. 물론 비평가가 될 만큼의 깊이가 없기도 하고.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인 건가.

연극 비평가.  보진 못했지만... 사진: 문화뉴스

 영감 찾기에 눈이 멀어 정작 영감을 찾지는 못했다.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에서 꺼낼 이야기에는 이 영화가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인 경험을 하는 것도 그 또한 경험이고, 지금 바로는 아니어도 언제든 영감이 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의 영감이 된 셈이니까. 그리고 이 글은 다음에 또 다른 영감의 알맹이가 될 수 있다.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언제든 꺼내쓸 수 있다. 기록은  잊힌 경험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예전에 많은 인생 선배들이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나중에 하지 뭐'라고 생각했었다. 경험을 집중적으로 쌓는 젊은 날에는 몰랐다. 이것들이 어떻게 쓰이게 될지. 나이가 들어 경험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때가 되니 이제 알겠다. 젊은 날의 수많은 소중한 경험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그 경험들을 살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기록이라는 것을.

영감을 찾아 방문한 미술관, 이날의 기록이 다음에 어떤 영감으로 작용할까?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SNS로 소통한다. SNS에 올려진 사진들을 보면서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 간의 관계를 떠나서 영감의 소통창구가 되기도 한다. SNS의 사진들은 그것을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일상의 기록이 된다는 점에서도  매우 유용하다. 어떤 사진을 올려야 할지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기록의 차원에서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사진을 올리는 데 능숙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짧은 글이라도 덧붙이려 노력을 한다. 나중에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SNS는 저처럼 영감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들에게는 좋은 사냥터"라고 최근 인터뷰에서 밝힌 자우림의 김윤아씨. 사진:스타뉴스

 이제야 뒤늦게 기록이라는 것을 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쌓아온 경험들을 그냥 내팽개치고 있었다. 그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거라 믿으면서. 영원한 기억은 없다. 영원한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기록이 나에게 영감을 떠오르게 만들고, 그 영감이 새로운 경험으로 이끌고, 그 경험은 다시 기록으로 기억된다. 그런 의미에서 하다만 블로그도 다시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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