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나 Apr 12. 2019

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우리가 사랑한 속도

 모차르트 소나타 12번 2악장의 빠르기는 안단테, 느리게이다. 안단테는 걷는 속도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하는데, 실제로 안단테의 어원이 '걷다'라는 이탈리아어 'andare'에서 왔다. 일반적으로 소나타 형식의 2악장은 안단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빠르기로 진행되고, 모차르트의 18개 소나타도 역시 그러하다.

걷는다고 하니 걷는 사람, 하정우 씨가 생각나네요. 사진 : 한국경제 (문학동네 제공)

 1번을 알레그로, 내가 좋아하는 빠르게로 신나게 연주하고 만나는 2악장은 첫마디부터 어설프게 주춤하게 된다. 안단테여서 나름 속도를 많이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천천히요, 걷는 속도를 생각하세요."라고 선생님에게 매번 지적받기 때문이다. "제 걸음걸이가 빨라서 그래요." 물론 선생님에게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나의 안단테는 그렇다 치고, 매우 빠르게를 나타내는 프레스토를 걸음걸이에 비유하면 어떨까. 프레스토를 100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렸을 때 속도로 표현하면, 20초즘에 끊었던 나로서는 남들보다 한참 느린, 프레스토답지 않은 프레스토가 될 수밖에 없으니, 이렇게 되면 나의 안단테와 프레스토는 서로 너무 가까워지게 된다. 결국 나의 안단테는 속도가 더 늦춰지거나 프레스토는 더 빨라져야 되는 셈인데, 후자보다는 전자가 실현 가능하겠지. 걷는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니 안단테의 느낌도 제각각이라는 말을 던지기 이전에 실력부터 제대로 쌓아야겠다는 반성의 마음도 들고. 일단은 나의 2악장을 들었을 때, 벚꽃길을 느긋하게 산책하는 느낌은 들게 브레이크를 더 밟아보자.

 

 안단테든, 프레스토든 모든 곡들은 빠르기가 있고, 같은 곡 안에서도 악장에 따라 빠르기가 바뀐다. 그 안에서도 어느 순간에는 점점 느리게를 뜻하는 '리타르단도'가 나타나 속도를 줄이기도 하고, 다시 원래 템포로 돌아오는 '아 템포'도 있다. 이런 속도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도 적용된다. 지금 나는 어떤 빠르기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속도가 나에게 적정한가. 그동안 너무 느긋했던 속도를 높여 아 템포로 돌아가야 하는데 자꾸 머뭇거리고 있을까, 아니면 너무 지쳐 숨이 가쁜데 리타르단도를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일에는 속도를 강요하면서 어떤 일에는 속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일은 우리에게 흔히 일어난다. 평소에 무척 느긋해 보였던 친구가 유튜브에 새로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반응이 빨리 오질 않아 의기소침해한다. 팟캐스트를 제작한 경험이 있는 나는 너무 서둘지 마라, 아직 반응이 올 때가 아니라는 말로 위로했다. 생각해보니 작년에 나도 그 친구처럼 느려 터진 반응에 속상했었는데, 이렇게 남에게 조언도 해주는 날이 오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는 빠른 결과를 얻길 바라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재촉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면서도 늘어나는 주름살 앞에서는 반대로 속도가 늦춰지길, 아니 아예 정지해 버렸으면 하니... 설마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여하튼 이런 나의 바람과는 달리 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고, 나이 드는 일은 속도 앞에 ‘가’ 자가 더 붙어 있음을 하루하루 경험하고 있다.  


 최근에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었다. 주인공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쓰였다. 광고계에서 성공한 주인공은 은퇴 후 본인이 평소 꿈꿔 온 대로 그림을 그리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터지는 심장 문제와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그를 죽음과의 전쟁터로 몰아넣는다. 그것도 질 게 뻔한.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들이라고 묘사됐던, 그림 그리며 보내는 노년의 일상들은 지루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펼쳐지고, 가장 두려워하던 죽음은 예기치 못하게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같은 시간 안에서도 느리게, 빠르게가 다르게 적용되는 속도는 이렇게 우리가 끝까지 벗어나지 못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진한 여운이 남는 책, 에브리맨.

 같은 시간 안에서 느끼는 서로 다른 속도는 피아노 연주할 때도 일어날 수 있다. 특히 이번 주에 지적받은, 왼손이 없는 부분에서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는 오른손 같은 문제 말이다. 왼손을 같이 칠 때는 박자를 잘 맞추다가 왼손이 없어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질주하는 내 오른손을 잘 말리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오른손은 나만의 독무대를 갖는다. 가끔은 이 빨라진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음도 불안하고 덜컹거리는데, 그러다 깜짝 놀라 그제야 깨닫는다. 아! 내가 정말 빨리 치고 있었구나.  


 내 안에서도 이렇게 속도의 불균형을 느끼는데 다른 사람과는 어떨까. 영화 "우리가 사랑한 시간"에서 한적한 교외에서 음악 선생을 하는 주인공은 아내에게 이번 오케스트라 정식 단원 오디션에 통과하면, 맨해튼으로 이사 가자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창의적이고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도시, 맨해튼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반면에 지금의 여유로운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아내는 경찰차 사이렌에, 바퀴벌레가 나오는 맨해튼이 싫고,  결정적으로 집값이 너무 비싸서 안된다는 입장이다. 같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지금이 정체돼 있다고, 다른 사람은 오히려 풍요로워졌다고 다르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가치관의 차이는 결국 두 사람의 속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도시의 속도처럼 빨라지고 싶은 주인공과 지금의 속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아내. 원하는 속도가 다른 두 사람은 누구의 속도에 맞춰야 되는 것일까. 아니 서로 맞춰지는 것이기는 할까.

영화 '우리가 사랑한 시간'에서 우연은 아니겠죠? 급변하는 속도감이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쇼팽의 발라드 2번을 연주하네요.

  같은 상황에서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어떤 속도를 원하는지, 어떤 속도에서 편안한 지도 우리의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처럼. 인생의 순간마다 속도는 제각각이다. 어떤 속도든 상관없다. 지금이 안단테든, 알레그로든, 아주 느린 라르고든. 다만, 각각의 속도 안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상대적으로 덜 추웠던 지난겨울의 영향으로 봄이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찾아왔다. 적어도 3월까지는. 정작 더 따뜻해져야 할 4월에는 느닷없이 추워져 봄이 찾아오는 속도가 늦춰지다 못해 뒤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 때문인지 개나리와 벚꽃이 동시에 함께 피는 속도의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조금 뒤죽박죽인 듯 보이지만 그래도 봄은 왔고, 꽃은 폈다. 늘 그렇듯이 아름답게. 그렇게 정신없이 핀 개나리와 벚꽃처럼 우리도 지금 짊어지고 있는 속도의 무게를 이겨내는, 아니 즐기는 그런 봄이 되길 바라본다.  


이전 12화 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