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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Jan 04. 2019

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매달림의 시간

 우리보다 새해를 열두 시간 정도 늦게 맞이하는 뉴욕 타임 스퀘어의 새해맞이 카운트 다운 뉴스를 보면서 아... 그래, 정말 새해가 왔구나 실감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의식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긴 하지만, 타임 스퀘어를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 흩날리는 종이 조각들이 내 마음을 흔든다. 붙잡고 싶은  순간들, 아니 그냥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처럼 뒤섞여 마구 뒤엉킨다. 이 종이 조각들은 잡고 싶다고 쉽게 잡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들처럼 말이다. 갑자기 지난해가 되어버린 2018년의 시간들과 오래전 뉴욕에서의 추억의 시간들이 겹치면서 몽롱하다. 그렇게 새해 첫날은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주말을 또 기다리고 있네. 

 2019 카운트다운. 이 순간 여기 서 있으려면 추위에 떨며 이른 오후부터 버텨야 한다. 어느 시점부터는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인데,무척 고단한 새해맞이다. 사진 : obsnews

 요즘 나의 일상에서 제일 비중 있는 일은 피아노 연습이다. 올해 안에 무대에 서겠다는 나름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하지 뭐.  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지 않아서 실력을 키우려면 시간을 많이 쏟아부어야 한다. 사실 하루에 두 시간 연습으로도 부족하지만, 지난 번에 언급한 것처럼 두 시간을 채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으니 두 시간이라도 잘 지켜야 된다. 피아노 선생님이 지난 시간에 지적한 대로, 잘 되지 않는 부분은 한 마디씩 끊어서 연습했다. 한 마디가 틀리지 않고 잘 넘어가면, 그다음 마디로, 또 그다음 마디로, 부분 연습에 집중했다. 단 한음 정도 틀리거나 버벅대지 않을 때까지 완벽하게 연습을 했다. 

연습의 흔적으로 점점 지저분해지는 악보. 

 그렇게 레슨 날이 다가올수록 자신감은 커져 갔고,  당당한 모습으로 선생님 앞에서 모차르트 소나타 11번을 쳤는데... 이 노래가 지나간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아... 애모... 옛날 사람... 나 혼자 연습할 때, 그러니까 레슨 전날에 쳤던 그 유연한 손놀림과 빈틈없는 터치는 어디로 갔는가. 그렇게 누구에게 보이지 않게 숨기려고 아껴둔 실력은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한 번 틀리니까 꼬이고, 꼬이니까 당황해서 더 꼬이고, 실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부분들을 당혹스럽게 못 쳤다. “선생님, 저 연습할 때는 이러지 않았어요.” “많은 학생들이 다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다들 이러지 않았다고.” 웃으며 답하시는 선생님과 함께 웃을 수만은 없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믿으셔야 돼요. 진짜 연습할 때는 다들 더 잘 쳤을 거예요.” 갑자기 연대감으로 똘똘 뭉친 학생 대표라도 된 것 같다. “진짜 무대에 섰을 때도 연습할 때랑 비교해서 80퍼센트 정도 나오면 진짜 잘 친 거예요. 어떤 피아니스트든 다 비슷할 거예요. 자기 연주에 만족하긴 힘들어요.” 정말 진지하게 다음 질문을 던진다. 절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아니다. “그럼, 평소보다 더 잘 치는 경우도 있을까요?” “있긴 있죠. 정말 어쩌다 한 번, 그것도 당연히 준비를 완벽히 했을 경우예요.” 그래, 피아노에 요행이 있을 수 없지. 정말 연습하고 준비한 대로 나오는 거다.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이면 비평가가 알고, 사흘이면 청중인 안다고 했다. 누군가 알기 전에 연습을... 연습을 열심히 하란 이야기다. 

피아노 앞의 Leonard bernstein, 명언을 많이 남겼다. 사진 : 경향신문(Yousuf Karsh)

 김연아 선수의 예전, 아! 이것도 벌써 5년 전이네... 올림픽 영상을 봤다. 정말 흠잡을 데 없는 무대, 정확한 점프와 우아한 몸짓은 지금 봐도, 아니 몇 번을 돌려봐도 완벽하다. 이런 연기를 펼치기 위해서 그녀가 얼마나 수없이 뛰어오르고, 돌고, 또 넘어졌을지 굳이 말을 해서 무얼 할까. 빙판 위에 서기 전에 땅 위에서 그녀의 훈련은 이미 시작됐다. 끊임없이 달리고, 근육을 단련시키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지구력과 힘, 유연성을 갖추기 위한 과정들은 아침 해가 매일 다시 뜨는 것처럼 반복이다. 이런 기본 훈련 과정은 스케이트를 막 시작했을 때부터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해왔을 터. 그래야 미끄러운 얼음에서 두려움 없이, 완벽한 자세로 자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으니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피겨 스케이팅처럼 피아노도 기본 훈련 과정을 매일같이 반복해야 되는 일임을, 특히 나에게,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서다. 물론 이 둘 뿐이겠는가. 세상의 많은 일들이 다 마찬가지지. 

2014 소치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 사진 : 아시아경제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하농 시간은 참 지겨웠다. 도미레미도미파솔 라파솔파라솔파미, 레파미파레파솔라시솔라솔시라솔파... 같은 박자로 한 계단씩 올랐다 내렸다, 이건 트레드 밀에서 천천히 걷기처럼, 아니 그보다 더하겠지, 요즘 트레드 밀은 tv를 보면서 걸으니 덜 지루하잖아. 열 번씩 쳐오라는 선생님의 숙제에 정말 몸을 비틀면서 연습했다. 하농 연습이 끝나면 재미없는 체르니가 기다리고 있었고, 이 과정이 끝나야 비로소 모차르트도, 슈베르트도, 베토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다. 하농으로, 체르니로 손가락을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훈련했기 때문에 그다음에 만나는 소나타를 어렵지 않게 연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도 잘 잊는다. 이렇게 기본 훈련을 충실히 하면, 어려운 곡을 만나도 연습 시간을 확 단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아르페지오도, 스케일도, 어차피 비슷한 패턴으로 곡들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미리 손가락 움직임을 연습해두면 수월해진다. 피아노 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우리 몸이, 근육이 기억하는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근육이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려면 방법이 있는가. 성심성의껏 반복 연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피겨 스케이터든, 피아니스트든, 무대에서 갑자기 잘되는 동작은 없다. 매일 반복 연습한 몸이 기억한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일 뿐. 지금의 지루한 반복은 그 어떤 시점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결국 끝나지 않는 의식이다. 아나운서 때도 뉴스 시작 전에 매번 목을 풀고, 입의 근육을 풀고, 뉴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알고, 뉴스 담당 피디가 알고, 시청자가 안다. 그래, 연습하자. 연습. 

도미레미도미파솔...제가 하농하면 흥얼거리는 곡이 22번이었네요.  하농을 왜 연습해야 하는지 이유가 여기 다 있네요.

 에단 호크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Seymour:An Introduction"를 보면서 피아노 외길 인생을 걷는 나이 아흔의 대가에게서 새로운 영감과 동시에 따뜻한 기운을 받는다. 또다른 번스타인인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은 관심이 가는 것을 꼭 붙들고 결실을 맺을 때까지 매달리라고 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라면서 말이다. 그렇다. 결실은 맺을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매달리는 거다. 매달림의 시간,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다. 그렇게 피아노에 매달리고 몰두해서, 영화 속 시모어의 말처럼 나의 두 손으로 하늘을 만질 수 있다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지만,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아...  

'나의 두 손으로 하늘을 만질 수 있다면니 미쳐 생각지도 못했네.'라는 사포의 싯구를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시모어가 읊조렸는데, 진짜 울컥했죠. 사진: MBN(영화사 진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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