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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Mar 15. 2019

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가까이 더 가까이

 키스 해링 전시회에 다녀왔다. 예전에는 미술관에 가면 나 홀로 조용히 감상하는 게 좋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도슨트의 설명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우르르 작품 앞에 모여서 이야기를 듣노라면, 또랑또랑 눈동자를 반짝이며 수업 듣던 어린 시절 생각도 나고 좋다. 내가 아는 것도, 내가 잘 몰랐던 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도, 내가 놓쳤던 것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시간. 배우는 것은 이미 다 졸업했다 생각했는데, 배우는 일이 진짜 재밌어진 것은 이제 와 나이 들고나서니. 그럼 뭐 본격적으로 더 배워볼까.

이번 주 일요일이면 끝나는 키스 해링전. 도슨트 님의 열정적인 설명이 좋았어요!

 “키스 해링의 그림을 좀 가까이서 들여다보세요. 그림에 뭐가 희미하게 비치지 않나요?” 도슨트의 말에 가까이 다가간다. 어머, 어머. 보인다 보여. 아이를 좋아했다는 키스 해링은 작품 뒷면에 그가 즐겨 그렸던 빛나는 아기(Radiant baby) 아이콘을 서명으로 작게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 그래피티로 알려진 작가답게 어딘가에 자신의 존재감을 꼭 남기고 싶은 습관 같은 걸까. 뭐가 됐든 이 희미한 아이콘은 가까이 들여다봐야 보인다. 도슨트의 설명도 가까이 가야 잘 들린다. 가까이 가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다.

위에는 빛나는 아기 아이콘, 그리고 아래 그림에서 오른쪽에  희미하게 비치는 아이콘 보이죠?

 가까이 다가가야 되는 것 중에는 피아노 건반이 있다. 건반에 거의 달 듯 말 듯 손가락을 갖다 대고 피아노를 치면 손가락의 힘이 다른 데로 새어 나가지 않고 온전히 건반으로 옮겨갈 수 있다. 게다가 높은 데서 찍어 누르면 실수로 옆에 있는 음을 건들 확률이 높아지니, 가까이서 건반을 눌러야겠지. 사실 피아노를 연주해 본 적이 없더라도 이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앞에 노트북 자판이 있는데, 높은 데서 찍어 내려 누른다고 상상해 보자. 쓸데없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손가락 끝이 꺾이기도 하고, 기역을 치려다 시옷을 누르게 되지 않는가. 타자 연습을 하던 그 옛날, 독수리 타법 정도를 떠올리면 될까. 자판을 훑듯이 가까이서 눌러야 빠른 속도로, 힘들이지 않고, 정확하게 글을 쓸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잘못 쓴 글자는 지우고 다시 치면 되지만, 피아노 건반은 다르다. 한번 친 음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우리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한음 한음 가까이서 신중하게 눌러야 할 수밖에.

독수리 타법은 이런 것이죠. 사진:연합뉴스

 모차르트 소나타 12번을 치고 싶다고 하니 선생님은 어려운 곡이라고만 이야기했지만, 표정은 “각오 단단히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눈치챘어야 했었다. 12번은 잘 풀리지 않는 숙제라는 것을. 그러나 그 당시 11번을 막 끝낸 나는 왠지 모를 자신감에, 그저 해맑았던 거다. 그도 그럴 것이 12번은 악보 자체가 별로 복잡해 보이지 않았다. 샵이나 플랫이 많이 붙은 것도 아니고, 굉장히 빠른 속도도 아니고, 옥타브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렵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무리 없이 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연습하면 할수록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무난하게 시작하는 12번, 1악장의 악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1악장을 다 듣고 난 선생님의 질문. “피아노 소리가 어디서 나나요?”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는 순간 해머가 움직여 현에 작용하면서 소리가 나는 것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이렇게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했다. 망설이고 있는 내게 선생님은 좋은 소리는 더 깊은 데서 나온다고 했다. 이어지는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내가 건반을 누르는 그 순간을 지나 건반이 아래로 더 내려갈 때, 딸깍하고 뭔가 걸리는 느낌이 아주 미세하게 오는 그 지점이란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건반을 눌러보니 쑤욱하고 들어가는데,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타점이 건반 바로 윗면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간 지점이라고 생각하면서 눌러야 좋은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아주 미묘한 시간 차로 어디서부터 손가락에 힘을 주어야 할지가 달라진다는 뜻이겠지.


 이것은 운동신경이 없는 내가 겁 없이 골프를 배웠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골프채를 위에서부터 힘껏 휘두른다고 공이 멀리 나갈까. 내 경험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능숙한 골퍼라면 힘이 딱 필요한 그 순간에, 여전히 어느 지점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힘을 몰아서 보내면,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시원하게 날아간다. 여기서도 채가 공에 닿았다고 그 역할이 끝난 게 아니고, 어느 시점까지는 공을 쭈욱 밀어주는 게 중요한데, 아마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도 뭔가 비슷한 원리가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골프 영화 "베가 번스의 전설" 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사진 : 한국경제

 이 알듯 말듯한 이야기가 평소 내가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의 답이 될 줄이야. 수업할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선생님이 시범 삼아 누른 음의 소리가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나의 피아노 실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은 안 되지만, 한 음을 눌렀는데 소리가 차이가 난다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겨우 한 음인데. 이렇게 표현하면 슬픈 일이지만, 나의 소리는 밥이 좀 덜 돼 부슬부슬한 느낌이라면, 선생님의 소리는 아주 찰진 느낌이었다. 내가 의식적으로 힘을 내서 세게 눌러봐도, 반대로 선생님이 살살 눌러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밥 참 먹음직스러워 보이네요~ 사진 : 전북 중앙

 결국 건반 하나를 누르는 것도 누가 어떻게 누르느냐에 따라 소리의 깊이가 달라지고, 그 차이는 그 연주를 계속 듣게 만들고 싶은지, 그만 듣고 싶게 하는지로 이어진다. 소리의 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누구도 이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아 한참 뒤에나 스스로 깨달았다는 선생님에게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걱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이렇게 부족한 제자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소리를 제대로 만들어낼 자신이 없기도 하니 그게 문제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피아노 건반과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어느 순간 느낌이 올 거예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을 부른 이광조 님의 속마음도 사실은 가까이 가고 싶은 거겠죠? 사진 : 스포츠투데이

 그렇다. 어쩌면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 이미 문제가 해결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멀리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면 달라지지 않는다. 가깝게 더 가깝게 다가가자. 피아노 건반에도, 전시회의 그림에도. 들리지 않던 좋은 소리가 들리고, 보이지 않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일 테니까. 그리고 나에게도 가까워지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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