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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Dec 07. 2018

피아노와 나

 다른 일을 하다가 뉴스가 시작한지도 모르고 있었다.  뉴스가 거의 끝날 시간이군, 하면서 TV를 켰는데,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나온다. 아니, 이게 뭔 일이람! 조성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클래식계의 아이돌급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그래서 단 한 번도 그의 공연에 가보지도 못한, 나에게 너무 먼 피아니스트다. 그가 TV에 나오다니... 심지어 라이브로 피아노 연주까지 한단다.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가슴이 뛰고, 그 순간에 TV를 돌린 내 손가락을 칭찬한다. 쇼팽만 잘하는 피아니스트가 아님을 보여주고 싶어서 모차르트에 도전한다는 조성진이 뉴스룸에서 연주할 곡은 모차르트 환상곡 3번. 심지어 이곡은 내가 줄리어드에서 리사이틀 곡으로 연주했던 곡이라 더욱 반갑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5분 30초 동안 휴대폰 카메라로 연주 장면을 녹화했다. 

손석희 앵커와 안나경 앵커가 무척 부러운 상황.  사진 : JTBC뉴스룸 

 연주가 끝나고 한참을 감동에 젖어 있던 나는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도입부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분위기가 전환되는 부분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곡의 흐름을 살펴본다. 손가락 터치와 손목의 쓰임을 관찰하고, 건반을 누르는 힘도 느끼고... 아, 이렇게 가까이서 카메라로 찍으니까 공연장에서 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자세히 볼 수 있어 좋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연주자라도 생방송 뉴스에 출연해서 피아노를 친다는 게 무척 부담스러운 일일 텐데, 그 어려운 일을 이렇게 대담하게 해내는 모습도 존경스럽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면서도 소리가 아주 깔끔한 그의 연주에 감탄하면서 그렇게 밤은 지나간다.

마침 뉴스를 틀어 이렇게 녹화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사진: JTBC뉴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손가락이 하필 그 시간에 리모컨을 누른 것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뉴스에서 나오는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최근에 뉴욕을 다녀와서 다시 새롭게 마음먹은 일이 있다. 피아노를 다시 쳐야겠다, 그것도 이번에는 제대로 레슨을 받아서 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나의 기운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줄리어드에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 것도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였다. 끊어졌다고 생각했던 그 운명이 다시 시작되는 신호라고 받아들여도 괜찮겠지. 

8년만에 다시 찾은 줄리어드 스쿨. 밖에서 내리는 빗방울처럼 추억은 방울방울...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 뉴욕에서 막 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우리 집과 줄리어드 스쿨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나중에 줄리어드에 갈 거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긴 했지만, 그때는 줄리어드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한 소리였다. 세월이 지나 대학에 들어가고, 회사에 들어가고, 나는 피아노와는 전혀 관련 없는 길을 걸었다. 마음속에 피아노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링컨 센터에 위치한 줄리어드 스쿨. 암스테르담 애비뉴와 브로드웨이 사이, 65번가에 위치해 있다. 

 그날 오후는 글쎄... 이상했다. 뉴욕에 와서 초반에 적응하느라 약간 지쳐있던 나는 여기서 이렇게 무의미하게 지낼 수 없다는 생각에 갑자기 의욕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줄리어드 홈페이지.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입학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래도 궁금은 했는지 자연스럽게 피아노과를 들어가 보았다. 이브닝 디비전에서 비전공자 성인을 대상으로 한 피아노 수업이 있었고,  동시에 그 수업의 오디션 신청이 마감되기 몇 분 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종이 울리기 직전 답안지에 정신없이 답을 옮길 때만큼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단 오디션 신청이 전화로 가능한지 물어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주겠다는 말에 오디션 날짜를 받아 적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줄리어드와, 아니 피아노와 인연을 다시 맺게 되었다. 

이번 뉴욕 방문 때 빌렸던 개인 연습실. 줄리어드 연습실은 이제 학생이 아니라서 못 들어갔다. 줄리어드때는 연습하느라 사진찍은게 없나... 찾아봐야겠다. 

 뉴욕에서의 2년은 꿈처럼 지나갔다. 내가 원하는 곡을 찾기 위해 줄리어드의 악보 도서관을 헤매고, 그전에는 쳐보지도 못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원 없이 치며, 비올라 전공자 레이첼과 듀엣도 해보고, 지금은 없어진 전설의 스타인웨이 홀에서 리사이틀도 가져보고... 그중에서도 가장 꿈같았던 순간은 줄리어드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칠 때였다. 잠시 내가 피아노 연습을 멈출 때 옆방에서 들려오는 연주 소리에, 너무 잘 치는 학생들이니까, 귀가 황홀했던 기억들이다. 어떤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듣고, 아니 감상하고 있었다. 

줄리어드의  마스코트, 펭귄들을 보니 학교를 빛낸 수많은 동문 아티스트들이 떠오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김대진, 임동혁 등이 여기 출신이다. 

 내가 원해서, 내가 자발적으로, 그것도 부담 없이 즐기며 무언가를 해본 적이 진짜 오랜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계속 함께하고 싶었지만, 뉴욕에서의 2년은 아쉽게 끝났다. 돌아온 한국에서의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어쩌면 잔인하게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게. 나에겐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일들의 무게에 묻혀 피아노도 잊혔다. 줄리어드, 피아노 모두 다 지난 추억이 돼버렸다.

카네기홀... 내년 1월에 조성진의 공연이 여기서 있구나...

 회사를 그만두고 쉬다가 올해 나는 팟캐스트라는 것을 새롭게 시작했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에 뛰어들다 보니 나만의 콘텐츠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점점 쌓인다. 나만의 콘텐츠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무렵 나는 뉴욕을 다시 찾았다.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무리해서 떠났다. 나는 왜 이렇게 매번 뉴욕으로 향하는가. 뉴욕에 무엇이 있길래 그럴까. 무엇 때문에 그곳에서 행복했었지... 아... 피아노, 피아노 때문이었다. 

 

줄리어드에서 나를 가르치신 지혜 선생님. 한학기 끝나고 나서 한국어 하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었지... 이번 방문 때도 잠시 짬을 내 가르쳐주신  고마운 선생님.

 뉴욕에서 돌아온 뒤 나는 8년 만에 다시 피아노 레슨을 받기로 결심했다. 며칠 전 선생님을 처음 만나던 날, 어린아이처럼 설렜다. 내가 왜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는지, 나의 목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동안의 나와 피아노 사이의 역사까지 묻지도 않았는데 신나서 이야기했다. 그동안 매니큐어를 칠했던 손톱도 다 잘라내고, 비장하게 다음 레슨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나와 피아노의 인연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물러서는 일은 없으리라. 다시, 피아노. 정말 반갑다. 

무대 인사 중인 조성진 님... 드디어 직접 연주를 듣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도이치 그라모폰 120주년기념 갈라 콘서트장에서. 

p.s. SNS에 뉴스룸의 조성진 연주 장면을 녹화한 영상을 올린 걸 보고, 제 친구가 운 좋게도 표를 구했습니다. 저는 이틀 연속 조성진 님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지요. 다시, 피아노! 이쯤 되면 우연이 아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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