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쇼팽의 바다

by 박아나

나도 몰랐다. 휴양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쇼팽의 발라드를 듣게 될지. 그것도 쇼팽이 머물렀던 스페인 마요르카의 바다도 아니고, 그가 거쳐간 프랑스 마르세유의 바다도 아닌, 베트남 호이안의 바다에서. 그러나 그 어떤 음악보다 쇼팽의 발라드는 바다와 어울렸다. 평온해 보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변덕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 바다의 모습과 쇼팽의 발라드는 닮은꼴이었을까.

다낭.jpg 베트남 호이안의 바다. 사진 : 노컷뉴스호

밀려오는 파도와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편안하다. 오랜만에 찾은 바다는 바쁜 도시 생활에서 누리기 힘들었던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나를 무장해제시킨다. 그렇게 바다에서 며칠이 지나고, 시간이 정지한, 아니 시간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것 같은 바다에서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급습한다. 나를 긴장시키는 생각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걱정들. 이런저런 불안의 감정이 나를 뒤흔든다. 내 눈 앞바다는 여전히 평온한데, 내 머릿속은 물결이 거세게 출렁인다. 평온의 끝은 우울과 닿아 있는 걸까. 정신없이 바쁘게, 불안할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평온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 차 살아갈 것이냐. 실제로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은 없겠지만. 평온한 바다 앞에서 흔들리는 나는, 어쩌면 마음 편히 바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인가 보다. 아직은.


쇼팽은 바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가 바다 위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것은 아마도 바르셀로나에서 마요르카섬 팔마로 배를 타고 떠났을 때였을 거다. 파리의 추운 겨울을 피해 따뜻한 남쪽 섬을 꿈꾸며 떠난 그의 여행은 처음에는 기대감에 설레었을 것이다. 게다가 옆에는 그를 살뜰히 챙겨주는 사랑하는 연인 상드가 있었으니, 마요르카행 배 위에서 느낀 바다는 희망의 바다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긴 여행 끝에 도착한 마요르카 섬은 쇼팽에게 절망이었다. 마요르카의 겨울은 기대했던 것만큼 따뜻하게 그를 품어주지 못했고, 심한 기침을 하다 폐결핵으로 진단받은 쇼팽은 발데모사에 있는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짙은 안개가 자주 끼는 수도원은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음침한 환경이었는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적만 흐르는 이상한 곳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쇼팽에게 그곳은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쇼팽은 그의 우울한 마음을 담은, 그렇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은, 아름다운 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빗방울 전주곡이라고 알려진 전주곡 15번 D플랫 장조도 여기서 작곡됐고,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됐던 4번 E단조와 6번 B단조 전주곡도 여기서 만들어졌다.

카르투하 수도원.jpg 발데모사의 카르투하 수도원 전경. 겨울이 아니라서 그런지, 쇼팽이 지냈을 때처럼 그렇게 암울해 보이지는 않네요. 사진 : 노컷뉴스

바다를 닮은 발라드 2번도 마요르카에서 완성되었다. 잔잔한 바다에서 어느새 폭풍우 몰아치는 격정의 바다를 묘사한 것 같은 발라드 2번은 아마도 발데모사 수도원 생활에서 느꼈던 그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잔잔하게 빗방울 소리만 들리던 창문이 돌연 거친 비바람으로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의 마음도 함께 흔들린다. 영원히 여기서 고립되면 어쩌지. 몸이 회복되지 못하고 죽으면 어떡하지. 파리의 집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불안과 초조의 시간들을 어렵게 견뎌내고, 마요르카를 떠나는 바다 위에서 "드디어 파리로 돌아가는구나!" 하고 외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마요르카.jpg 아니,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데... 예전에 저도 마요르카 섬을 갔더랬지요. 근데 사진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없네요... 사진: OBS

마요르카에서 느꼈던 그의 불안한 마음은 그가 작곡한 전주곡들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외출한 상드를 걱정하며 빗방울 전주곡 15번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쇼팽의 불안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곡이다. 쇼팽이 이 곡에 빗방울이라는 표제를 직접 붙인 것은 아니고, 음악평론가 한스 폰 뷜로가 한 것인데, 쇼팽의 전주곡을 최초로 녹음했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러나 죽음이 여기 있다, 어두운 그늘 속에’라는 다소 시구 같은 표제를 붙였다. ‘그러나 죽음의 빗방울이 여기 있다’라고 두 표제를 줄이고 늘려서 합쳐보면 어떨까. 2번 A단조도 역시 마요르카에서 만들어졌는데, 뷜로는 죽음에 대한 예감, 코르토는 괴로운 상념, 황량하게 보이는 먼 바다로 표제를 붙였다. 죽음까지도 떠올릴 만큼 괴로웠던 감정이 쇼팽이 바라본 바다가 아니었을까.

쇼팽.jpg 1849년, 그가 죽던 해에 남긴 사진. 사진 : 위키피디아

이렇게 괴로웠던 마요르카에서 돌아온 이후 쇼팽은 마요르카의 바다를 떠올렸을까. 만약 그랬다면 다시 생각난 바다는 그에게 조금 다른 의미였을까, 여전히 힘든 바다였을까. 쇼팽의 마음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번에 다녀온 바다는 쇼팽이라는 큰 과제를 내게 안겨줬다. 쇼팽의 발라드는 불안한 도전이지만, 바다가 품고 있는 또 다른 희망의 모습처럼 황홀한 불안이기도 하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잘 해냈으면 좋겠다.

발라드2.JPG 안단티노로 차분히 진행되다 갑자기 프레스토 콘 푸오코, 정열을 가지고 아주 빠르게 연주해야 하는 발라드 2번. 이런 평온과 격정을 오가는 대비를 잘 살려 표현해야 한다.

바다에서 떠나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또다시 비가 내린다고 한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원 없이 들어도 되겠지. 아니 연주해도 되겠다. 이런 아름다운 곡을 감상하고 연주할 수 있음에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