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by ORANGe T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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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댈러웨이 부인


“인생은 감방의 벽을 긁는 것이지요.”

인생을 정의한 이 한마디를 소설 밖으로 뚝 떼어내 각자의 삶을 대입해 생각해 본다면 이 사람이 생각하는 ‘감방’과 저 사람이 생각하는 ‘감방’은 너무나도 다를 테니 다양한 의견과 해석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밖이 아닌 소설 안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러니까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심정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댈러웨이 부인>의 작품 이해를 위해선 이 한마디 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듯싶다.

일단 우리가 먼저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1)감방->좁은 공간에 갇혀있다.

2)벽을 긁는다->갇힌 공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3)벽을 긁어서는 절대로 감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벗어나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4)벽을 긁는 몸부림에서 오는 고통과 괴로움.



소설의 진행은 이렇다. 꽃을 사러 나온 댈러웨이 부인, 즉 클래리사의 시선에서부터 시작해 피터, 루크레치아, 셉티머스, 윌리엄경, 휴 위트브레드, 브루턴 부인, 리처드 댈러웨이, 클래리사, 미스 킬먼, 엘리자베스, 루크레치아, 엘리, 그리고 다시 클래리사 시선의 이동을 따라 그들의 내면 속 의식들을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서술하고 있다. 그 유명한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쓰인 이 소설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지루함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일단 의식의 흐름에는 논리가 부재한다. 예컨대, “그의 엷은 갈색 눈에는 불안의 빛이 감돌고 있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까지도 불안스럽게 만들었다. 세계는 마침내 채찍을 쳐든 것이다. 이 채찍은 대체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의 호응이 전혀 맞지 않음에도 작가는 간간히 이런 식의 문장을 쓰고 있다. 논리가 없고 이리저리 이동하는 시선들 때문에 작품을 읽는 독자에겐 당연히 혼돈을 야기될 수밖에 없다.


대체로 작품에는 어떤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권선징악이든 인생의 교훈이든, 아니면 어떤 철학적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의미보다 의도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듯한데, 그것은 소설의 내용보다 글의 형식과 스타일에 더 치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형식의 의도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지루한 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클래리사가 주최하는 파티 장면이 나온다. 파티 장면이 나오면서부터 감정의 선을 건드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몽환적이면서도 아련하고 조금 슬프기도 한 어떤 것이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일단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클래리사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셋이 있다.


1. 피터 윌슨: 클래리사와의 사랑에 실패한 이후 방랑과 방탕한 시간 속에서 살아온 남자로 영국을 떠나 인도에서 생활하는 등 어떤 면에서 예술가형 인물이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클래리사와는 반대된다.

2. 셉티머스: 전쟁에서 친했던 상사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청년이다. 우울증과 환각증세로 항상 자살충동을 느끼며 살아가는 셉티머스는 언제라도 생을 끝내고 싶어 하는데, 이런 점은 언제나 세속적인 삶에서 우아하게 늙어가기를 원하는 클래리사와도 상반된 삶의 시간을 지니고 있다.

3. 미스 킬먼: 이 여인은 하층 계급으로 외모 콤플렉스와 빈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지식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위안을 삼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이가 많음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부유한 상류층 여인인 클래리사를 질투한다.



피터와 셉티머스, 그리고 미스 킬먼은 모두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한 단면들인 것처럼 느껴진다. 피터처럼 예술가적이면서 셉티머스처럼 평생 우울증을 앓아왔고, 미스 킬먼처럼 가난하지만 지식인이었던 버지니아 울프는 이 세 인물과 너무나 닮아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클래리사는 어떤 인물일까? 그것보다 우선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댈러웨이 부인’일지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작품에선 분명 댈러웨이 부인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주인공임에도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 속 ‘댈러웨이 부인’은 하나의 관념으로 읽힌다. 그녀는 ‘사랑’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미래’일 수 있다. 또는 큰 틀에서 ‘행복’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처럼 살 수 있다면 말이다. 파티를 열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클래리사와 같은 삶은 어쩌면 울프가 정말로 원하던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으며 사는 작가가 반대로 세속적인 삶이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늙어가는 것이 최대로 본인이 원하던 삶의 모습이 아니었는지.


하지만 울프는 본인이 갈망하던 댈러웨이 부인이 될 수 없다. 절대로 자기가 갇혀있는 운명의 성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울한 인생의 감방에서 아무리 벽을 긁고 몸부림을 친다 해도 평생 그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작품에서 실현한다.



파티장 안에서 피터는 클래리사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는 걸로 작품이 끝을 맺는다. 정확하게 저 앞에 클래리사가 눈에 보이지만, 분명 조금만 다가가면 만날 수 있음에도 미처 피터의 욕망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 역시 작가가 클래리사를 아련한 한조각의 꿈처럼 놓아두었기 때문에, 자신도 그 꿈에 근접할 수 있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작품의 끝을 이렇게 해놓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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