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위에 놓여진 슬픔 ep-9

by 옥상 소설가

香 향기로울 향 美 아름다울 미

향미

향기로운 아름다움



오빠의 첫사랑 향미 언니

달콤하고 향긋한 여름 복숭아의 냄새가 언니에게서 진하게 풍겼다고 했다.

언니는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성관계에 숙맥이었던 남자에게 여자란 존재를 일깨워 준 선악과

내재되어 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발현시켜준 존재

한 여름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오빠는 누군가를 떠 올리는 듯 복숭아를 잠시 보다

하얀 부분을 신중하게 베어 물었다.


오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언니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후 계속 언니만을 좋아했다.

언니도 오빠를 처음 본 순간 멈칫했다고 했다.

향미 언니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언니였다.

오빠는 한 번도 언니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 적은 없었다.

언니도 오빠에게 고백을 하지는 않았다. 고백을 할 필요는 없었다.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고, 남자와 여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둘 사이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태어난 후였다.

오빠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태어나면서

우리 집에는 나를 구경하러 오빠 반 여자 친구들이나 동네 언니들이 놀러 오곤 했다.

엄마는 오빠의 친구들이 놀러 오면 센터에서 배운 샌드위치나 햄버거 간식 등을 푸짐하게 내주면서

오빠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매번 말하곤 했다.

간식이 맛있기도 했지만

여자 아이들에게 갓난아기란 귀여움 그 자체였다.

서로 먼저 안아보려고, 아기의 얼굴을 만지려고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실 갓난아기는 좋아하는 남학생의 집에 놀러 갈 수 있는 적당한 핑곗거리이기도 했다.


오빠는 그중 향미 언니가 놀러 오는 것을 반색하며 맞았다.

수줍어 얼굴이 벌게지면서도 강아지가 어미개를 보는 듯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언니가 놀러 온다고 하면 오빠는 귀가하자마자 꽃단장을 하고 나에게도 가장 예쁜 옷을 입혀달라고 했다.

향미 언니는 나를 자주 업거나 안고 다녔고, 언니 주위에는 항상 오빠가 있었다.

언니는 나를 사이에 두고 오빠와 셋이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을 좋아해서

내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오빠와 언니에게 사랑의 오작교였다.


오빠는 이른 아침 언니의 집 앞에서 언니가 나오길 기다리며 함께 등교했다.

학교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언니가 나오면 자신도 그때 나온 척 언니와 함께 등교했다.

그리고 둘의 등교 시간은 점점 더 빨라졌다.


어렸을 적 언니는 그저 얼굴이 예쁜 여자 아이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제법 여자 티가 나면서 중학교 형들이 언니를 구경하러 초등학교 교문 앞으로 떼를 지어 구경을 오기도 했고

학교의 총각 선생님들은 유난히 언니를 예뻐했다고 했다.



동그랗고 작은 얼굴에 하얀 피부 눈코 입이 오밀조밀하니 귀여운 얼굴이고 볼에 복숭아 빛이 연하게 돌았다.

가슴이 나오고 엉덩이가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허리는 잘록해 보여 아가씨처럼 보이기도 했고

키가 크고 늘씬해서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실제로 길에서 향미 언니에게 반한 남자 고등학생이 언니를 쫒아와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언니의 큰 오빠에게 빗자루로 맞을 뻔했다고 했다.

언니 위로 두 오빠들은 언니가 밤늦은 시간에 귀가하거나 통금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항상 언니를 마중 나왔다. 애지중지 키운 귀한 딸이었다.

오빠도 큰 키에 덩치가 좋았고 변성기를 지나 목젖과 수염이 나오면서 제법 총각티가 났다.

게다가 공부까지 잘하는 모범생에 성격이 순하고 착해서

딸 가진 동네 아줌마들은 오빠를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곤 했다.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것을 안 향미 아줌마는

처녀 총각이 되어도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으면 사돈 맺어도 되겠다는 농담을 엄마에게 건네곤 했고

엄마는 웃어넘겼지만, 언니는 엄마의 성에 차지 않았다.

엄마는 얌전하고 순한 성격의 여자를 좋아하는 데

언니는 반대의 성격으로 활발하면서도 끼가 많은 타입이었다.


언니는 얼굴은 예뻤지만 모범생은 아니었으며 티브이에 나오는 탤런트나 가수처럼 연예인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아저씨와 오빠들은 여자가 연예인은 절대 안 된다고

대학교에 진학해서 취직을 하거나 시집을 일찍 보낼 것이라고 했다.

언니는 연예인이 되고 싶어 기획사나 스타를 키워 준다는 매니저를 몰래 찾아가려고

몇 번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화가 난 아저씨는 언니의 긴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싹둑 잘라버리고 한 동안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예쁜 여자는 남자 손을 타서 팔자가 드세진다고 엄하게 단속했다.


자라면서 오빠는 언니와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언니를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없어 가끔 언니네 대문을 서성거렸다.

아저씨와 오빠들은 오빠에게는 호의적이어서 언니와 오빠가 잠깐 만나는 것을 눈감아 주곤 했다.

하지만 언니는 연예인을 향한 꿈으로 들떠있었고 샌님 같은 오빠를 답답해했다.

오빠에게서 언니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각자 여중과 남중에 진학하면서 얼굴을 볼 기회가 더 없어졌고

오빠가 언니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오빠는 버스보다 언니를 더 기다렸다.

언니는 항상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버스를 기다리곤 했는데

오빠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오빠를 아는 체하지 않았고

오빠는 그것을 알면서도 매일 아침 언니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력고사를 마치면 오빠는 정식으로 언니에게 프러포즈해서 연인으로 발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언니도 언니의 식구들도 모두 둘의 교제를 허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오빠는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없다.

얼마 전 엄마는 오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정기적인 치료를 다녔지만 차도는 없었고, 의사도 이제 올 필요는 없다고 했다.

오빠는 소년으로 돌아가 유년 시절을 반복해서 보내고 있었다.

매일 아침

오빠는 시장을 나와 큰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와 고등학교를 연결해주는 안내를 했다.

비가 와도 오빠는 우산을 들고 정류장으로 나갔다.

매일 아침 오빠가 버스 번호와 고등학교를 호명해줘서 정류장의 학생들은 친구끼리 수다를 떨거나 단어장을 보고 있어도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


점차 버스 정류장에서 오빠의 역할이 도드라졌다.

혼잡한 출근과 등교 시간에 교통순경이 지원을 나오거나 모범택시기사 아저씨가 복잡함을 해소해주었는데

오빠가 나오니 아저씨들의 수고로움이 덜 해졌다.

순경 아저씨는 오빠에게 호루라기를 선물했고

택시 기사 아저씨는 오빠에게 교통안내라는 큰 글자가 새겨진 완장을 주었다.


그 날 이후 오빠는 매일 아침 정류장에 나갈 때마다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완장을 차고 다녔다.

엄마가 그것들을 숨겨버려도 그것들을 다시 찾을 때까지 오빠는 떼를 쓰고 울었다.

오빠에게 그것은 목숨보다 귀한 보물이었다.

엄마는 단지 오빠가 이른 아침 학교에 가던 습관이 남아있어서 버스 정류장에 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빠가 가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버스 정류장과 버스는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나뉘어 있었고

같은 번호라도 빨간 버스는 빨간 정류장에, 파란 버스는 파란 정류장에서만 정차했다.


사고가 있기 전 향미 언니와 오빠는 매일 아침 빨간 정류장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마주치더라도 말은 안 했지만 서로를 기다린다는 것을 눈빛으로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

소년으로 돌아간 오빠가 빨간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정리한 것을 본 향미 언니는

다시는 빨간 버스 정류장으로 오지 않았다.

언니는 친구들과 파란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타곤 했다.


오빠를 보는 것에 대한 괴로움인지

소년이 된 오빠를 좋아했었다는 수치심인지 그것은 모른다.

다만 언니가 이제 더 이상 빨간 정류장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언니가 오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빠만 모르고 있었다.

학생들이 다 떠나고 버스 정류장에는 직장인들만 남아 여유롭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데

오빠는 정류장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이제 집으로 가자고 오빠의 어깨를 감싸는 순간

“ 향미야, 향미야 ” 웅얼거리는 오빠의 소리를 들었다.

오빠는 향미 언니를 만나기 위해 초저녁부터 잠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언니를 만나러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엄마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빠의 정신은 어린아이였지만 몸은 향미 언니를 좋아하는 청년 그대로였다.

향미 아저씨와 오빠들이 이 사실을 알면 오빠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엄마와 오빠가 길을 가다 향미 언니와 아줌마를 마주치면 향미 아줌마는 떨떠름하게 오빠를 쳐다봤고,

마지못해 오빠의 인사를 받은 뒤 언니를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아줌마에게 오빠는 더 이상 탐나는 사윗감이 아닌 기피해야 할 대상이었다.

엄마는 아줌마의 눈빛을 보며 그 마음을 읽어냈다.

그 날 이후 엄마는 더욱더 철저히 오빠를 따라다녔다.

오빠와 언니 사이에 사단이 날까 두려워 감기에 걸리고, 몸살이 나도 오빠를 따라다녀야 했다.

남녀 간의 일은 터졌다 하면 대형 사고이며 그것은 오빠에게 상처를 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엄마는 오빠가 받을 고통과 아픔을 막아내고 싶었으며

그런 오빠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아파서 오빠를 따라다니지 못하는 날은 내가 따라다녀야 했다.

그런 날은 내가 선교원에 빠지는 것을 엄마도 용인했다.


나와 엄마는 그렇게 오빠를 따라다니며 언니에 대한 오빠의 감정이 사그라들길 바라고 있었다.

엄마가 밤 외출을 하고 내가 오빠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며 오빠를 재워주고 있었다.

오빠는 해님 달님이 된 오누이를 가장 좋아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했는지 오빠는 금방 잠이 들었다.

나는 오빠를 빤히 쳐다보다가

해님이 된 오빠와 달님이 된 누이처럼

오빠가 해가 되고 내가 달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얼마나 보고 싶을까 생각했다.


그때였다.

“콕콕콕” 누군가가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여자 목소리였다. “ 중아야 중아야 ~ ” 오빠 이름을 부르는 소리다. 익숙한 목소리다.

‘ 누구지? 누가 이 밤중에 오빠 방 창문을 두드리지? ’


오빠 방은 집 가장자리에 있어 창이 골목길로 나있다.


“ 중아야, 중아야 ”

‘ 향미 언니다. 향미 언니 목소리다. ’

“ 오빠 자고 있어. “ 언니에게 말해주려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언니가 밤에 오빠 창을 두들기는 이유는 뭘까? ’


아무도 모르게, 엄마 몰래 오빠를 찾아온다는 것은 왠지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언니는 오빠 방 창을 조금 더 두들기다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언니가 아무도 모르게 오빠를 밤에 찾는 이유를

다음 날 아침 엄마에게 언니가 밤에 오빠 방에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는 흥분해서 언니를 찾아가 다시 오빠에게 오지 말라고 할지 모른다.

그것보다 언니가 오빠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일 것 같았다.

엄마에게 오늘 밤은 내가 오빠랑 같이 잘 테니 엄마는 안방에 가서 편히 자라고 하고

오빠 옆에 나란히 누웠다.

11시쯤 되자 다시 오빠 방의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잠이 든 척 눈을 감고 있었다.

오빠는 내가 잠이 들었는지 확인을 하고 창문을 열었다.

“ 향미야 ”

“ 중아야, 너 어제 일찍 잤어? 내가 왔었는데 너 자는 것 같더라. ”

“ 응, 어제 일찍 잤어. ”

“ 중아야, 잠깐 나오면 안 돼? ”

“ 알았어, 나갈게. ”


오빠는 겉옷을 입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는 조용히 오빠와 언니 뒤를 따라갔다.

오빠와 언니는 조심스럽게 걸어가다 골목길 맨 끝 계단에 앉았다.


“ 중아야, 오늘은 뭐 했어? ”

“ 응, 오늘은 집에서 엄마랑 종이 접기도 하고, 엄마랑 시장에도 갔다 오고, 병원에도 다녀왔어. ”

“ 병원? 왜? 누가 아팠어? ”

“ 응,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어. ”

“ 그랬구나.......

중아야, 이제 그만 버스 정류장에 나오지 마.

나 어차피 빨간 버스 정류장에는 못 가. 나오더라도 나는 없으니까 나오지 마.

아줌마랑 집에 편히 있어. 심심하면 현아 선교원에 데려다주고, 우리는 이렇게 밤에 가끔 보면 되잖아. “

“ 왜? 나는 너 아침에 일찍 보고 싶은 데.......

네가 교복 입고 책가방 메고 예쁘게 가는 모습 보고 싶은 데. “


“ 중아야, 이럴 줄 알았으면....... 네가 이렇게 돼버릴 줄 알았으면

좀 더 너한테 잘해줄걸, 네가 아침마다 나를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나는 너를 모르는 척했는데

내가 그렇게 해도 너는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언제나 너는 그대로일 거라 생각했어.

내가 아무리 새침을 떨어도 너는 나를 그대로 기다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너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걸 그랬어.

나중에 대학입시가 끝나고 나면 그때 내가 너에게 고백을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돼 버렸을까?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중아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


향미 언니는 오빠에게 기대어 울기 시작했다.


“ 향미야, 울지 마.

네가 울면 나도 눈물이 나. 울지 마. 향미야. “

나는 향미 언니가 오빠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언니에게 소년이 된 오빠는 필요 없어 파란색 정류장으로 가서 오빠를 다시 보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얼굴도 예쁘고, 인기도 많고, 잘 나가는 향미 언니

이제 언니에게 오빠는 다 지워진 상대이며

언니의 과거 한 부분에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언니는 여전히 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오빠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하는 언니는 아직도 오빠를 잊지 못해 밤마다 찾아오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언니가 오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서서히 오빠를 지워나가는 것일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오빠에 대한 언니의 마음이 남아있어 오빠에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아직 오빠를 잊지 않았다.


언니를 향한 오빠의 마음

오빠를 향한 언니의 마음이

서서히 속도를 맞추어 식어가기를 바랬다.


언니는 한 참을 울다 오빠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대문 앞에서 서서 언니는 결심한 듯 말했다.


“ 중아야. 우리 내일 이사가.

이사 가면 우리 다시는 보지 못할 거야.

중아야. 내가 이사 가면 다시는 버스 정류장에 나가지 마.

나는 이제 버스 정류장에 없을 테니까

호루라기를 불고 버스가 온다고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지 마.

이제 아침마다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워.

중아야,

나는 너를 참 많이 좋아했어. 네가 나를 좋아한 것도 알아.

나는 너를 기억할 거야. 내가 어른이 되고 할머니가 돼도

네가 나를 많이 좋아해 줬다는 걸. 내가 너를 정말 좋아했다는 걸 기억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 잊지 마. "


언니는 뒤돌아 터벅터벅 걸어갔다.


“ 향미야. 향미야,

향미야, 가지 마. 향미야, 가지 마. “


오빠는 울면서 언니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언니가 뒤돌아 와서 오빠에게 입을 맞췄다.

오빠는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붙더니 언니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둘 사이의 시간은 멈춘 것 같았다.


둘 만의 시간에서 깨어난 언니는 오빠를 뒤로 살며시 밀어내더니 자기 집으로 뛰어갔다.

오빠는 언니를 잡지도 못하고, 서있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며 울고만 있었다.

오빠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빠는 그 자리에서 언니를 아침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오빠, 집으로 들어가자. ”

내가 오빠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오빠는 내 손을 세차게 놓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으려고 했다.


“ 현아야, 향미가 내일 이사 간데.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데. 어떻게 하지? “

“ 오빠, 언니는 다시 올 거야. 언니가 좀 더 커서 어른이 되면, 언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른이 되면

언니는 꼭 다시 오빠를 보러 올 거야. 그러니까 들어가자.

언니가 와서 오빠 방 창문을 두들길 수도 있으니까 오빠 방으로 가서 얼른 누워있자. “

“ 그래, 얼른 가서 누워있자. ”


언니가 오는 방법을 깨달은 듯 오빠는 순순히 내 말을 들었다.

오빠는 한 참 동안 언니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오빠가 잠든 모습을 보고 나서 나도 잠을 자려고 했지만 왠지 잠도 오지 않았고 자꾸만 눈물이 났다.

다음 날 오빠는 버스 정류장에 나가지 않았다.

오빠는 일어나자마자 향미 언니네 집으로 가서

언니네 짐이 이삿짐 트럭에 실리고 있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언니는 아줌마랑 이미 이사 갈 집으로 가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트럭이 짐을 다 싣고 출발해서야 오빠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오빠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펴고 누웠다.

아침을 먹지도 점심을 먹지도 않고 말없이 누워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듯 창문만 바라보았다.

오빠가 밥을 먹지 않자 엄마만 애가 탔다.

오빠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방범창과 창문 사이에 작은 쇼핑 봉투가 있었다.


“ 중아에게 ”라고 쓰여진 편지봉투와 작은 앨범이 들어있었다.

앨범을 열어보니 초등학생 오빠부터 고등학생 오빠까지 오빠의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 합기도 도복을 입은 사진

학예회 사진, 오빠, 나, 향미 언니 셋이서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사진

모든 사진에는 오빠가 있었다.

그리고 향미 언니의 독사진이 한 장 있었다.


앨범의 맨 마지막 장에는

빨간 버스 정류장에서 오빠가 완장을 차고 호루라기를 불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의 오빠는 밝게 웃고 있었다.

누군가를 향해 환하게 해님처럼 웃고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요술공주 밍키 마법을 걸다. ep-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