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 16. 모든 시작은 너로부터

by 옥상 소설가


“ 연우야, 새벽이라 추우니까 옷 따듯하게 입고 달려. “

“ 응, 엄마 걱정하지 마. ”


연우는 엄마 윤희를 닮아 천식이 있었다.

선아, 선우가 죽은 후 극심한 스트레스로 연우는 천식이 발작적으로 일어나곤 했다.

‘ 건강해야 해. 모두를 지키려면 다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

대문을 나와 언덕 아래로 달리는 순간 연우는 이른 새벽 택시에서 내리는 강우와 화란과 마주쳤다.

강우는 연우를 보고 얼음처럼 굳었고, 화란은 연우를 보고 강우와 잡은 손을 스르륵 놓고 있었다.


“ 오빠,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

“ 이 언니랑 어디 갔었어? “

“ 왜 같이 오는 거야? “

“ 나, 오빠한테 줄 게 있는 데 ”

“ 오빠 보고 싶었어. 오빠는 나 안 보고 싶어? ”


온갖 호들갑을 떨며 강우에게 달려와 질문들을 쏟아냈어야 할 연우였다.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차분히 강우와 화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우의 눈빛은 집요하고 차분해서 화란은 순간 공포까지 느끼고 있었다.


‘ 그래, 지금 쯤 이겠구나.

강우 네가 고 1 때부터 화란과 연인이 되어 깊은 관계를 시작했다고 했지.

어젯밤도 함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니? 그렇게 죽고 못 사는 관계였다면 사실대로 말하지 그랬니?

그랬다면 너희 둘도 나도 모두 행복할 수 있었는데?

니 옆에 있는 화란이 우리 선아 선우를 죽일 때 너 알고 있었니? 아니면 너도 몰랐니?

몰랐다고 해도 이제 상관없어. 한번 겪어봐. 얼마나 아픈지 고통스러운지

눈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을 때 무력하게 지켜봐야 만 했던 내 심정을

너희들은 그 두 배, 세 배, 열 배의 고통을 느끼게 해 줄게.

내가 사랑한 모두를 죽인 너희들 기다려. ‘


‘ 연우, 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넌 예전의 그 어린애가 아니야? '


강우도 연우를 보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우의 눈빛은 항상 맑고, 기쁨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아이의 눈빛이었다.

크리스마스쯤부터 연우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어떨 때는 살기마저 느껴졌다.

눈빛만이 아니었다. 표정, 행동, 분위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모진 풍파를 다 겪고 살아 낸 노인처럼

온갖 감정들을 다 담긴 듯 연우의 모든 것은 깊어져 있었다.

14살 중학생 소녀의 눈빛과 행동은 절대 아니었다.

연우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화란은 강우의 손을 끌어 대문으로 향했다. 별채에만 들리는 작은 초인종을 눌렀다.

사장님의 식사와 출근 준비를 하려고 영자는 깨어있을 것이다.


“ 내가 먼저 들어갈 게. 너는 조금 있다 들어와.

사모님이 어제 우리 둘이 있었던 걸 아시면 분명 화를 내실 거야.

친구네 집에서 잔다고 못 들어간다고 엄마한테 전화는 했지만. 사모님이 믿으실지?

너희 엄마는 눈치채고 계실지도 몰라. 오늘은 일단 조용히 들어가자. “


화란은 대문을 열고 별채로 들어갔다.

강우는 화란이 들어간 후 한 참 생각하다 연우가 뛰어 내려갔을 길을 봤다.

찜찜하고 뭔가 석연치 않았다.

연우는 한참을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달려도

강우 손을 잡고 나란히 웃고 있던 화란이 잊히지 않았다.


‘ 나를 정신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던 그날도 너희는 손을 잡고 왔었지. ’


연우는 손에 잡히는 데로 수면제를 털어 넣던 과거를 그 날을 떠올렸다.



********************


강우는 항상 무뚝뚝하고 차가웠다.

그것이 연우를 자극했는지 모른다. 갖고 싶게 더 안달 나게 했는지 모른다.

엄마 윤희는 몸이 약하고, 천식이 심해 자주 누워있는 날이 많았다.

날이 추워지고 감기에 걸리면 폐렴으로 전이돼 병원에 두, 세 달씩 입원해 있었다.

연우는 형제가 없어 항상 외로웠고, 옆집에 살고 있는 친구 신애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언제부터 강우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강우를 좋아하는 것은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강우가 연우에게 살갑게 굴거나 먼저 말을 건 적은 없었다.

가끔 한번 물끄러미 연우를 보고, 간단한 대답만 했다.

강우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연우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연우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친구가 없었다.

신애가 친구랑 놀러 간다고 연우를 두고 가버려서 혼자 집에 오던 길이었다.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데


“ 야, 우연우. 똥 멍청이 우연우

우리 반 왕따, 꼴등 우연우 킥킥킥 “


어느새 남자아이들 대여섯이 연우 뒤를 따라오면서

연우에게 신발주머니를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책가방을 발로 차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럴 때는 울지 않아야 했다. 그저 앞만 보고 가야만 했다.

연우는 그렇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듯 걸어가고 있었다.

“ 야, 우연우

너 우리가 하는 소리 안 들려? 들었으면 뭐라고 말을 해야지? “


‘ 퍽 ’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바닥으로 넘어져 버렸다.

가장 덩치가 큰 아이가 연우의 책가방을 날아차기로 차 버려 연우가 넘어진 것이다.

더 이상 설움을 참지 못하고 연우가 울어대고 있었다.


“ 그만 해.

남자 애들 여럿이서 여자애 하나를 괴롭혀? 저리 썩 꺼져. “ 신애의 오빠 강우였다.

“ 형이 누군데 그래요? 얘는 우리 반 왕따인데...... 무슨 상관이에요? ”

“ 얘, 내 사촌동생이야. 한 번만 더 그러면 혼날 줄 알아. ”


남자 애들은 후다닥 도망을 가버렸다.

그 이후 연우는 강우가 자신을 아빠처럼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연우가 걱정돼 재혼을 하지 않으셨지만 항상 바쁘셨다.

식구들의 빈자리는 강우와 강우의 식구들로 채워져 갔고

강우의 엄마 말자가 엄마 역할을 해줬다.


말자는 아들 강우를 ‘ 속정이 깊은 남자 ‘라고 했다.

말이 없고, 차가워 보이지만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 사실은 연우를 귀여워하고 좋아한다고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하고, 부모님을 졸라 강우와 결혼을 했지만

강우는 여전히 ‘ 속정 ’만 깊었다. 연우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안고 키스를 한 적은 없었다.

매일 밤늦었고, 국내와 해외 출장이 잦았다.

부부관계를 갖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연우를 향한 질문은 항상 “ 배란일이 언제야? ”였다.

가임기간 일 때만 강우는 연우와 관계를 가졌다.


첫 애 선아, 둘째 선우를 낳고서 그나마 가임 기간 동안의 성관계도 사라졌다.

강우는 종종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출장 캐리어를 가져가는 게 전부였다.

첫 딸 선아를 낳고서야 강우는 자주 들어오기 시작했고

선아가 ‘ 아빠 ’ 하고 아빠를 찾으며 아들 선우가 태어나자 잦았던 출장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밖으로 돌던 강우를 집으로 들어오게 했다.

연우는 강우가 없는 허전함을 tv와 쇼핑, 친구들과의 수다로 보내 곤 하다 선아와 선우가 태어나며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편 강우, 선아와 선우 시댁 식구들

연우의 가족은 그들이 전부였고, 남아있는 그들에게 감사하고 행복해했다.


선우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출장에서 급히 돌아오시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연우는 망연자실했고,

우울증에 한 동안 침대에서 누워만 있었다.

연우는 아버지의 부동산, 현금, CH 건설의 주식 등을 다 상속받았다.

시아버지 강석을 사장으로, 남편 강우를 팀장으로 승진시켜 연우의 재산을 관리하게 했다.

선아가 아파트 25층에서 떨어져 죽고

6개월 뒤 신애 부부와 화란이 함께 간 캠핑에서 연우의 아들 선우는 화재사고로 사망했다.

강우는 그 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는 연우, 가사 도우미 둘 밖에 없었다.

연우는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심해져 약물에 의존했고,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수면제 한 알로는 잠들지 못해 점차 약을 늘어갔다.


먹거나 물을 마시거나 잠을 자지도 못했다.

씻지도 못해 연우의 몸에서는 악취가 났고, 머리털은 빠지고, 백발처럼 머리는 하얗게 새 버렸다.

42살의 연우는 60이 넘은 노파처럼 늙어버렸다. 연우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손목을 긋고,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선아처럼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한 번은 아무도 없는 집에 가스를 틀어놓고 라이터를 켜 선우처럼 죽으려고 했다.

그때마다 고 할머니가 나타나 연우의 죽음을 막았다.

죽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죽지 못해 살아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눈을 뜨는 연우에게

어느 날 화란이 집으로 찾아왔다. 강우의 손을 잡고

“ 어휴~~~ 이 냄새 이거 노숙자 냄새인데.

연우야, 너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니 애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너는 살고 싶어?

밥이 넘어가고, 물을 마실 수 있니? 잠은 자고?

와~ 너 정말 대단하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돼 버리면 같이 죽어버리거나 미쳐 버릴 텐데.

너는 엄마도 아닌가 봐.


너 궁금하지?

왜 니 남편 강우 씨가 나랑 같이 왔는지.

왜 우리 둘이 손을 잡고 너를 구경하러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이상하지?

우리 둘을 보고 여태 껏 이상한 생각이 안 들었다는 건 네가 둔하다는 증거야.


강우 씨랑 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꽤 오래전에 시작됐고,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어. 네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우 씨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부터 우리가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으니

네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이겠구나.

매일 밤 강우와 내가 사랑을 나눌 때도

너는 ‘ 강우 오빠, 강우 오빠 ’ 하면서 강우를 따라다녔지.

그런 너를 보면서 강우와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부자 아빠 덕에 철없이 친구 오빠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 여자애

맨날 강우랑 결혼하겠다고 쫓아다니고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징징 울어대던 아이

재미있는 아이야. 너는

다행이지? 네 아이들은 모두 죽어버렸지만

강우 씨와 내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 우리랑 같이

내 아들 민욱이, 딸 수정이

네가 조카라고 부르고, 용돈을 주고, 귀여워했던 그 아이들은

니 자식 선아 선우와 배다른 형제야.

강우 씨 아버님 어머님 시누들 아주버님들 모두 다 알고 있었어.

명절 때마다 우리 아이들 찾아오시기도 하고, 우리가 가기도 했으니까

같이 여행도 캠핑도 다녔거든

선우도 우리 애들이랑 신애 아가씨 애들하고 같이 갔었잖아.

재수 없게 선우만 사고로 죽긴 했지만

그래도 너는 고마워해야 해. 내가 ‘ 최 ’ 씨 대를 이었잖아? 너 대신

집안 살림을 해주고 너희 아이들을 길러주던 아줌마가 우리 이모야.

이제 이모마저 너를 떠날 거야.

너는 주위 사람들에게 죽음과 재앙을 가져다주는 재수 없는 여자니까

너 때문에 죄 없는 우리가 죽거나 다칠 수는 없잖아

이제 그만 사라져 줘.


강우 씨, 얼른 사람들 올라오라 그래.

이제 그만 병원으로 보내야지. “

연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다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이상했고, 불운은 연이어 터졌다. 오직 연우에게만

홋카이도 겨울 여행을 엄마와 가라고 부추긴 강우 엄마 말자

출장에서 급히 돌아오다 교통사고로 죽은 아빠

선아가 25층에서 떨어진 날 집에는 화란의 이모 도우미 아줌마가 집에 있었고

신애 부부와 화란이 간 캠핑에서 화재 사고로 사망한 선우

연우가 사랑한 사람들의 죽음에는 항상 강우의 식구들과 화란이 있었다.

죽음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희뿌옇고 잡히지 않는 것들이 이제야 선명해지고 손에 잡혔다.

연우가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남자 대여섯이 들어와 연우의 집에 제갈을 물리고 진정제를 놓았다.

의식을 잃은 연우는

윤희 재단의 연우 정신 요양원으로 실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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