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쓴 남인도 문자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들뜬 마음으로 공항에 내렸을 때, 고개를 쭈욱 빼고 올려봤던 야자수가 떠오른다. 바다를 조금 건넜을 뿐인데 펼쳐진 생경한 풍경에 설레었던 그때 그 기억.
지금도 새로운 곳에 발을 내디디면 발견하는 낯선 풍경과 그것을 즐기는 나를 좋아한다. 낯선 이의 생김새, 처음 맡아보는 향신료, 피부에 닿는 햇살과 습도... 그중에도 글자와 식생은 무엇보다 강하게 이색을 느끼게 한다.
팜 나무(Palm tree)가 그랬다. 씨엠립 공항 뒤로 펼쳐진 벌판에 듬성듬성 높게 뻗은 팜 나무가 묘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팜 나무는 캄보디아 어디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열매, 줄기, 잎, 뭐 하나 버릴 데 없이 국목(國木)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스며 있다. 단단한 둥치는 배와 집을 만드는 데 쓰이고, 유분이 많은 열매는 짜서 기름으로 사용한다. 잎으로는 지붕을 덮고, 줄기에 달린 돌기는 톱날처럼 날카롭고 단단해서 과거에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널리 쓰이는 팜 나무에서도 특히 중요한 부분은 잎이다. 캄보디아 전통 책 ‘사스트라(sastra)’가 팜 잎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책의 역사를 보면 식물을 글자판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집트에서는 종이(paper)의 어원이 되는 갈대 종류인 파피루스(papyrus)를 가공해 글자를 적었고, 중국에서는 서기 100년 경 채륜(蔡倫)이 닥나무 섬유를 가공해 종이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도 일찍부터 인도 전 지역에 걸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팜 나무 잎으로 불교와 힌두교 경전을 기록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팜잎책은 9세기 네팔에서 제작된 것으로, 힌두교 시바(Shiva) 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는 훨씬 더 오래전부터 팜잎책이 널리 사용되었지만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책의 특성상 덥고 습한 기후에서는 파손되거나 썩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남인도 지역보다는 인도 북부와 네팔, 티베트 등지에서 만들어진 책의 수명이 상대적으로 더 길다.
그럼 팜잎책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잘 소개하는 영상이 있으니 한번 보시기를 추천한다.
인도의 브라흐미 문자에서 발전한 여러 글자들은 팜잎이라는 공통의 기록매체를 수세기 동안 공유했다. 그렇다면 어떤 도구로 이 팜잎에 글자를 썼을까?
네모 반듯하게 잘린 팜 잎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문자가 기록되었다.
1. 붓이나 펜으로 잉크를 묻혀 쓴 방식. 북인도와 네팔 등지에서 많이 쓰였다.
2. 철필로 새긴 방식(이하 철필식). 남인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인도 굽타(Gupta) 왕조의 찬드라굽타 2세(Candragupta II, 375-415 재위)는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북인도를 통일한다. 이때부터 굽타 왕조에는 브라만교(Brahmanism) 바탕에 민간신앙과 불교를 융합한 힌두교가 정착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마누 법전(Code of Manu)'도 이때부터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와 경전이 정비된다는 의미는 제의와 기록 시스템도 동시에 정돈된다는 뜻이다. 이때의 종교 정비가 남인도와는 확연히 다른 북인도만의 필기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브라흐미 문자는 초기 형태부터 글자 윗부분에 가로로 긴 쐐기 모양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붓과 잉크를 사용하는 북인도 방식에서는 가로획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북인도 문자는 이 쐐기가 흔히 '빨랫줄'이라 불리는 가로 선으로 굳어진 '데바나가리(Devanagari)' 형태로 진화했다.
반면 남인도 방식은 날카로운 철필(metal stylus)로 팜잎을 눌러 글자를 새기기 때문에 쐐기 모양의 가로줄을 반복적으로 새기면 잎맥을 따라 잎이 갈라질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남인도 계열 문자들은 가로획을 사용하지 않고 힘을 분산시킬 수 있는 곡선 형태로 발전했다. 아래 지역별 팜잎책을 비교해보면 남인도 계열 문자는 가로획이나 직선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남인도와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상좌부 불교(上座部佛敎, Theravada)가 팔라바 왕조 등을 통해 힌두교와 함께 동남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철필식 필기법이 동남아시아에도 퍼졌다. 미얀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 등에서 현재 발견되는 전통 팜잎책들은 모두 철필식을 따른다.
필서 재료는 중립적 존재가 아니다. 전체적 외관, 각 기호의 형성 방식, 그리고 필서 방향에 이르기까지 여러 면에서 문자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또한 ‘책’의 모양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많이 사용된 야자수 잎은 직사각형 모양의 책을 발생시켰다. 게다가 일단 특정의 관습이 생기면 … 전혀 별종의 재료로 대체되어도 그 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 석공은 별도의 도구를 필요로 하며 그의 도구는 종이나 파피루스의 부드러운 표면에 펜이나 붓으로 쓰는 것과는 다른 글씨체를 만들어냈다.
-『문자의 역사』, 알버틴 가우어 저, 강동일 역, 도서출판 새날, 60.
철필식 필기법에서 팜잎의 잎맥이 갈라지지 않도록 곡선이 발전한 것과 더불어 곡선으로 진화한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
철필식 필기법은 팜잎을 바닥에 고정시키지 않고 양손으로 들고 새긴다. 왼손으로는 팜잎을 지지하고 오른손으로는 철필을 눌러 힘을 가한다. 이때 오른손은 철필을 쥔 지지대 역할을 할 뿐, 세밀하게 글자를 쓰는 역할은 왼손 엄지가 맡는다.
팜잎책을 만드는 필사가는 대부분 스님들이었다. 세월이 지나 팜잎으로 만든 경전이 낡으면 새로운 잎에 정성스럽게 옮겨 적는 것을 일종의 수행으로 여겼다. 전문 필사가는 평소 왼손 엄지손톱을 길러 둥근 홈을 파놓는다. 이 홈에 철필의 머리 부분을 끼우고 왼손 엄지를 세밀하게 회전하면서 글자를 새긴다.
철필식은 필기구와 팜잎을 잡는 방식 때문에 전혀 새로운 몸의 운동을 만들어낸다. 직접 글을 쓰면서 움직임을 비교해 보았다. 아래 사진에서 필기구의 이동 방향과 중심축, 왼손의 역할, 손목과 팔의 움직임 등을 비교해보자.
종이에 펜으로 적는 방식은 오른손 손목을 지면에 붙여 지지한 상태로 오른손과 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글을 쓴다. 한 문자가 한 자음이나 모음의 음소를 나타내는 음소문자들은 적는 궤적이 일정한 직선 형태를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철필식 필기법은 팔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고 글을 새기는 동안 팜잎이 왼쪽으로 움직인다. 철필 끝과 팜잎이 닿는 부분을 축으로 철필이 회전하는 동안 오른손 손목은 그 회전을 돕는다.
(위 그림을 보면서 펜을 쥐고 오른손 오른손 엄지-검지-중지로 글자를 적어보세요.)
종이에 펜으로 적는 방법은 펜을 쥔 오른손 엄지-검지-중지의 회전에 편리한 반시계 방향으로 글자 형태가 잡힌다.
(위 그림을 보면서 왼손 엄지 손가락을 회전하며 글자를 적어보세요.)
철필식 필기법에서는 왼손 엄지가 회전하기 좋은 시계방향이 글자 형태에 반영된다.
오늘 알아본 크메르 문자에 얽힌 여러 요소들을 찾는 동안 롤레이 유적에서 고대 크메르 문자를 보면서 품었던 의문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1. 각진 모서리가 전혀 없다.
2. 획의 굵기가 모두 일정하다.
3.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나선형이 많다.
4. 반시계 방향으로 90도 회전한 '3'자 형태가 글자 위쪽에 반복된다.
이제는 스스로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각진 모서리가 없고 획의 굵기가 모두 일정한 것은 철필로 팜잎에 일정한 힘을 가해 적기 때문이다. 시계방향은 왼손 엄지손톱 때문이다. 글자 위쪽 3자 형태는 브라흐미 문자에 반복되는 쐐기 형태가 철필식에서 곡선으로 변해 크메르 문자에서 '머리카락'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33 자음에 담긴 의미부터 필기법과 손의 움직임을 생각한다면 크메르 문자는 인간의 몸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쯤 되면 크메르 문자는 '몸 글자'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이 대부분 풀렸다. 고대 무덤을 찾아낸 라라 크로프트(게임 '툼 레이더'의 주인공)처럼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현대 크메르 문자가 있기까지,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지 더 찾아보기로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