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흐미와 팔라바 문자
코칸 씨와의 만남 이후 인도와 동남아시아 문자의 연결고리를 더 탐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인도 교역 항로를 따라 동남아시아에 들어온 문자는 모두 인도의 ‘브라흐미(Brahmi) 문자’라는 기원을 공유한다. 브라흐미 문자는 먼 인도에서 캄보디아까지 어떻게 흘러왔을까?
브라흐미 문자는 고대 인도의 종교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표기하는데 쓰인 문자로, BC 5세기부터 AD 3세기까지 인도 전역에서 사용된 문자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은 대부분 마우리아 왕조(Mauryan dynasty, BC321-BC185)의 아소카 대왕(Ashoka, BC268-232 재위)의 돌기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소카 대왕은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을 통일했다. '법 기둥(Dhaṃma thaṃbhā)'이라는 이름이 말하듯, 아소카 대왕은 통치 칙령을 새긴 기둥을 전국에 세우고 강력한 왕권을 선언했다.
인도는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는 넓은 지역이다. 현재 인도에서는 공용어 14개와 공식문자 19개가 사용된다. 마우리아 왕국이 인도를 통일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된 브라흐미 문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각 지역 언어와 왕조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했다. 현재 사용되는 전 세계 문자 중에서도 브라흐미 문자에서 발생한 문자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인도 지형을 보면 빈디야(Vindhya) 산을 포함해 동서로 길게 뻗은 고원지대를 경계로 북쪽과 남쪽이 나뉜다. 오랜 옛날 북인도에는 서쪽에서 이주해온 아리아 인(Aryan)이 자리 잡았고, 인도 토착민 드라비다 인(Dravidian)은 아리아 인의 남하로 점점 빈디야 산맥 아래로 이동해 남인도 여러 국가를 세웠다.
아소카 대왕 이후 브라흐미 문자는 끊임없이 나뉘었다. 지형과 왕조에 따라 지방 특유의 문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모두 브라흐미 문자에서 발생했지만 수 세기가 지난 지금은 배우지 않고서는 지역 간 서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변모했다. 마우리아 왕국 이후 가장 크게 북인도를 통일한 굽타(Gupta) 왕조의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브라흐미 문자는 북인도 계열과 남인도 계열의 두 갈래로 나뉜다. 아리아 인이 주로 거주하는 북인도 브라흐미 문자는 긴 가로줄이 이어져 '빨랫줄에 걸린 문자'라고도 불리는 '나가리(Nagari)'로 발전했다. 반면 드라비다 인의 지역에서 발전한 남인도 브라흐미 문자는 낱자가 분리된 둥근 형태로 발전해 북인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브라흐미 문자'라는 같은 뿌리에서 발전한 문자의 형태가 남북으로 이토록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전에 크메르 문자와 브라흐미 문자의 연결 고리를 알아보자.
기원전 3세기 아소카 대왕의 기록부터 알아보기 시작한 브라흐미 문자 탐구는 크메르 문자로 이어진다. 남인도 브라흐미 문자에서 파생된 문자들을 추적해 각 문자의 첫 다섯 글자로 비교하는 계보도를 만들었다.
*다섯 글자 중 해당 언어에 없는 문자는 비워두었고, 미얀마와 인도네시아 지역은 제외했다.
*세로 간격이 시대를 대략 보여주지만 발굴된 비석 또는 문서에 따라 연대를 추정하는 고대 문헌 연구의 특성상 발생 시대와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남인도 브라흐미 문자의 계보도를 보면 고대 크메르 문자와 팔라바(Pallava) 문자가 매우 유사하다.
팔라바 왕조(Pallava dynasty, AD 275-897)는 남인도 동쪽 타밀(Tamil) 지역에 자리 잡았던 나라이다. 팔라바 왕조의 두 번째 전성기를 불러온 나라심하바르만 1세(Narasimhavarman I, 630–668) 때는 거점 도시 마하발리푸람(Mahabalipuram)에서 동남아시아와 활발한 해상 무역이 이루어졌다.
“상업과 행정은 일시적인 것이라 상당한 속도와 명확성을 가지고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단시간 내에 학습할 수 있고 견고하지 않은 물체 위에 흘려쓰듯이 재빠르게 쓸 수 있으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수의 기호가, 불명확하고 복잡한 관념 전달에 기초한 문자에 대해 결정적인 장점을 갖는다.”
-『문자의 역사』, 알버틴 가우어 저, 강동일 역, 도서출판 새날, 33.
무역 항로는 동쪽으로 중국, 일본 일부 지역까지 뻗어 있었고, 서쪽으로는 로마까지 교역한 흔적이 발견된다. 고대 항해는 계절풍(몬순)의 영향으로 항해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기에 인도에서 출항한 배가 중국에 닿으려면 동남아시아 지역에 머무르며 계절풍이 바뀌길 기다려야 했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Palembang), 자바 섬의 싱하사리(Singhasari), 베트남 중부의 인드라푸라(Indrapura) 등이 무역항으로 활발히 번성했다.
팔라바 사람들은 무역항 옥에오(Óc Eo)를 통해 크메르인들의 땅에도 들어왔다. 그들은 왕실의 조력자가 되어 법, 정치, 종교 등 팔라바 문자로 적힌 인도의 문물을 전해주었다. 종교의식에는 산스크리트어가 필요했기에,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만이 팔라바 문자를 크메르 땅에서도 그대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크메르 문자로 전해지는 앙코르 보레이(Angkor Borei) 비문에 적힌 글자는 팔라바 문자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팔라바 문자는 시간이 지나며 크메르어에 적합하도록 변해 오늘 우리가 보는 크메르 문자까지 이어진다.
최초의 브라흐미부터 크메르 문자가 탄생하기까지 수 세기가 흘렀다. 그 사이 등장한 여러 나라처럼 수많은 브라흐미 문자가 생겨났다. 인도 문명권의 수많은 문자들이 같은 기원(Origin)을 공유하면서도 저마다의 독창성(Originality)을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브라흐미 문자들의 변하지 않는 유전자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을까?
수 세기 전 문자의 역사를 파고든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캄보디아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기로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