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만큼이나 사람을 품은 코칸 씨
이 글이 쓰인 한글에는 동양의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천지인(天地人) 사상이 담겨 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하늘과 땅을 잇고 가꾸는 한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를 제자 원리에 담았다. 하늘(·)의 신이 되거나 땅(ㅡ)의 정복자가 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자연스레 어울리는 데 만족하는 인간(ㅣ)의 역할을 담아낸 것이다.
이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담긴 문자가 세상에는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크메르 문자에는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까.
크메르 문자를 연구하면서 문자 해부도(Anatomy of letters)를 만들어봤다. 타이포그래피의 관점에서 문자를 이루는 각 부분을 구분해 이름 붙이고 패턴을 찾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료를 찾아보아도 크메르 문자를 분석하거나 정의 내린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찾은 방법이 바로 태국의 타이(Thai) 문자 해부도를 참고하는 것이었다. 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댄 태국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도 디자인이 잘 발달해 타이포그래피 용어도 잘 정리되어 있고, 무엇보다 크메르 문자와 형태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해부도를 만든 몇 달 뒤,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장을 갔을 때 크메르 폰트 디자이너 소비쳇(Tep Sovichet) 씨를 만났다. 그동안 연구한 내용과 함께 나름 뿌듯해했던 문자 해부도를 꺼내 보여주었더니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타이 문자를 참고해 만드셨죠? 크메르 문자에 타이 문자와 비슷한 지점이 많지만, 안타깝게도 이 문자 해부도에는 큰 오류가 있어요.
캄보디아 사람들은 크메르 문자 한 자 한 자를 사람의 몸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위쪽에 반복되는 물결 모양은 태국식 ‘깃발’이 아니라 ‘머리카락’이라 부른답니다. 그래서 타이 문자를 ‘머리 잘린 근본 없는 글자’라 말하는 캄보디아 사람도 있어요. 타이 문자가 크메르 문자에서 머리카락을 떼고 단순화한 형태라는 말과 함께요.”
타이 문자는 13세기 말 수코타이(Sukhotai) 왕국의 ‘람캄행(Ramkhamhaeng)’ 대왕이 고대 크메르 문자의 필기체(Moul Pali style)와 미얀마의 퓨(Pyu) 문자를 기초로 태국 언어 체계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 반포한 문자이다. 방콕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Bangkok)에는 람캄행 대왕의 비문이 전시장 한가운데에 있다. 비문 주위를 빙 돌면서 글자를 천천히 들여다봤다.
람캄행 대왕은 당시 앙코르 제국이 사용하던 고대 크메르 문자의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오랜 앙코르 제국의 지배에서 독립을 이뤄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크메르 문자의 자음은 왜 33자일까?
캄보디아 사람들은 크메르 문자를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코칸(Leng Kokan) 씨에게서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코칸 씨는 30여 년 동안 캄보디아 전국을 돌면서 팜나무 잎(palm tree leaf)으로 만든 전통 책 사스트라(sastra)를 수집해 정리한 크메르 문헌 연구자이다. 프놈펜의 왓 우날롬(Wat Ounalom)에 있는 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코칸 씨가 물었다. "크메르 문자의 자음은 33자입니다. 그럼 왜 33자일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내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칸 씨는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독립모음 19자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자음 33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어떤 이는 크메르 자음 33자가 각각 불교의 성인 33인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힌두교의 33 대표 신을 상징한다고도 말한다. 오랜 세월 캄보디아의 고문서를 연구한 코칸 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글자에 담긴 의미를 알려주기 전에 '4원소(four elements)'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고대 크메르인들은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의 4원소, 즉 4대종(四大種)이 모든 물질세계를 구성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네 원소 중에서도 어머니와 관련된 열두 개의 물, 아버지와 관련된 스물하나의 흙이 부모 원소를 이룹니다. 물(12)과 흙(21)이 만나 이룬 33이 바로 우리가 아는 자음의 수인 것이죠. 그리고 이 33 자음이 크메르 민족을 나타냅니다.
크메르 문화는 다르마(Dharma, 법)가 우리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만약 조상이 우리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왜 각자 다를까요?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를 바라겠습니까? 만약 우리 조상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불완전할까요? 이 33 자음의 다르마가 바로 우리를 불완전하게 창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이 33 자음 안에 속해 있습니다. 더 깊은 얘기는 어려우니 이만하죠.
사스트라를 보여주면서 코칸 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스트라는 사원에서 쓰는 불경이나 기도문을 적는 용도로 고대로부터 전승되었습니다. 이 사스트라를 보실까요? 하나는 4행, 다른 하나는 5행이죠? 행 숫자에도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대부분 5행으로 적는데요, 부처님을 비롯한 5불을 상징합니다. 그다음 많은 것은 3행입니다. 부처님, 스님, 다르마를 상징하죠.
지금 보시는 4행은 아까 얘기한 4원소를 상징합니다. 경전에서 왜 4원소를 취할까요? 크메르 문자는 크메르인을 상징한다고 했죠? 사람은 태어나고 죽습니다. 만약 우리 몸이 죽더라도, 4원소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 사람이 죽어 매장된다면 그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화장되면 불이 되고, 수장되면 물로 돌아가지요. 나무에 걸어두는 풍장을 한다면 죽은 몸은 공기 중으로 흩어집니다. 이처럼 모든 죽은 이의 영혼은 4원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모든 영혼은 다시 생명이 되어 곁에 돌아옵니다.
4행으로 쓰인 사스트라에는 이런 크메르 조상들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에 의미가 담겨 내려오는 것이죠.
처음 들으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가깝게는 씨엠립 앙코르 투어 당시 방문한 니악뽀안(Neak Pean)에서, 멀게는 중학교 도덕 시간에 들었던 고대 그리스 철학의 4원소 설(흙, 물, 불, 바람)에서도 들어봤던 이야기.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삶과 죽음,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깊은 고민을 삶에 녹여냈다. 크메르인은 그 생각을 그들이 매일 쓰는 글자에도 담았다.
이외에도 코칸 씨에게 크메르 문자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여태까지 이런 이야기를 쉽게 듣지 못했던 이유가 궁금했다.
"이런 깊은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가는 현대 캄보디아인들이 많아요. 크메르인의 생각, 자랑스러운 정신과 문화가 다 사라졌어요. 크메르루주(Khmer Rouge) 이후로 이런 전통이 끊어진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1975년, 지식인을 비롯해 인구 3분의 1을 학살하고 캄보디아를 죽음의 땅(killing field)으로 만들었던 크메르루주 치하에서는 전통을 이어갈 책도 사람도 모두 끊어졌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생각이 담겼으나 현대사의 비극으로 '근본 없는 문자'가 되어버린 크메르 문자. 코칸 씨는 그렇게 지식 자산이 모두 사라진 폐허에서 사스트라 조각을 모아 전통을 지키고 있다.
코칸 씨와의 짧은 만남 끝 자락에 그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내 꿈은 모든 크메르 사람이 크메르 문자를 오해 없이 읽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력거를 끌던 그가 더듬더듬 독학으로 시작한 이 연구를 30년 동안이나 묵묵히 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크메르 문자 만큼이나 사람을 품은 그의 꿈이 내 마음에 가득 찼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