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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May 08. 2020

#9 마더 네이처

앙상한 박제의 현장


한낮에도 깜깜할만큼 덩쿨과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정글 속을 한참 걷다가 갑자기 거대한 유적을 만나는 상상을 해본다. 큰 배낭을 짊어진 탐험가가 되어 숲 속을 헤매다가 낭떠러지 코앞에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발견한 이끼 낀 돌판! 스윽 닦아내자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진 문자를 발견하는 이런 이야기. 만화 원피스에서 유일한 포네그리프(Poneglyph) 해석자 니코 로빈(Nico Robin)이나 사라진 무덤을 탐험하는 라라 크로프트(Lara Croft)의 모험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이름 없는 정글 깊은 곳에 엄청난 불가사의가 숨어 있다.



이런 모험심을 한번쯤 자극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앙코르 톰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가 어머니를 위해 만든 타 프롬(Ta Prohm) 사원이다.


거대한 스펑(Spung) 나무가 뿌리내린 타 프롬 사원. ⓒ2017. Noh Sungil


마치 용암이 흘러내리듯 육중한 나무 뿌리가 돌 위로 쏟아져내리는 기묘한 장면을 눈 앞에 마주하니 신비함을 뛰어넘는 경외감이 느껴졌다. 

견고하고 웅장했던 흔적이 이제는 거의 사라진 돌 무더기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자연과 인간, 그 너머의 신에 대한 생각까지 꺼내보기 좋은 순간이다.



수많은 사원을 지은 왕들을 떠올려봤다. 앙코르 왕국에서 '데바라자' 의식을 거행한 왕은 곧 신이다. 그래서 치세 기간 동안 공을 들여 위엄 있는 사원을 짓는다. 세계를 감싸는 바다를 대신할 해자를 두르고, 5층 기단의 가장 높은 곳에 힌두교에서 신들이 거처한다는 우주의 중심 메루(Meru) 산을 대신할 탑을 세운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난 문에는 상상 속 동물들이 입을 벌려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 땅과 물의 수호신 나가와 그를 감싸잡은 선신과 악신들의 싸움을 이곳 저곳 세워 화려하게 장식한다. 왕은 이제 신전의 중심에서 신의 대리자이자 화신(Avatar)으로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업을 행한다. 신화와 합치되어 신이 되고자 했던 왕의 생각이 공간에 담겨 있다.


1432년 앙코르 왕국이 태국의 옛 왕조인 수코타이(Sukhothai)에게 멸망했다. 왕은 앙코르를 떠나 남쪽으로-남쪽으로 갔다. 왕이 없는 곳에 신이 없고, 왕이 없는 곳에 백성이 없다. 힘을 잃은 왕에게 백성들도 더이상 자신의 안전을 의탁할 수 없다. 앙코르는 더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곳은 신전이니 뿌리내리면 안 된다'고 말해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나무 뿌리는 자유롭게 다리를 뻗는다. 작은 씨앗이 뿌리 내리는 조그만 힘에 신의 거처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화려했던 신의 조각들은 부서지고 퇴색했다. 신이 사라진 신의 도시는 거대한 자연으로 돌아갔다.


타 프롬 사원. ⓒ2017. Noh Sungil



이 폐허에 있는 사람의 흔적이라면 반듯한 돌들 뿐이다. 으리으리한 왕궁의 기둥과 천장을 버티던 단단한 목재는 길어야 한 세대를 지탱하는 죽은 나무일 뿐이었다. 나무로 지은 집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죽은 나무가 흙이 된 그곳에는 이제 뿌리째 살아 있는 그 나무의 후손들이 문어처럼 돌을 잡아먹은채로 사라진 문명의 주인이 되었다. 


앙코르 유적에서는 복원 작업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2017. Noh Sungil


잠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자리를 옮겨 사원을 걷다 보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나무를 잘라내는 전기 톱날과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돌들을 받쳐놓은 앙상한 철골의 삐걱거림, 정에 내리 꽂히는 까랑까랑한 망치 소리가 뒤섞여 고요한 밀림을 흔들고 있었다. 


유적지 복원은 오래전 인적이 끊긴 땅에 다시금 사람의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다. 이미 땅의 주인이 된 나무의 생명을 빼앗아 사라진 옛 조상의 흔적을 소생시키는 작업. 밀림에 깊이 숨겨졌던 문명은 그렇게 드러나 오늘 나에게도 이 멀리까지 찾아와 감상에 빠질 이유를 던져주었다. 복원 작업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무대 뒷편에서 바삐 메이크업을 하는 배우를 만난 것처럼 괜스레 민망함이 일었다. 공사 현장은 흡사 박제 과정을 지켜보는 것처럼 생각보다 앙상하고 처참한 풍경이었다. 생동감 있는 전시를 위해 단장하는 주검의 상태 그대로를 보았다.



어머니를 위한 공간


타 프롬은 나무를 일부러 베지 않고 복원도 최소한으로만 하고 있다. 장엄한 옛 모습을 복원하려면 거대한 나무를 잘라야 하지만, 이미 뿌리를 깊이 뻗어서 베어내면 그나마 남아 있는 돌들도 다 무너져 내린다. 다른 사원은 같은 상황에서 나무를 자르고 복원에 집중했지만, 타 프롬만큼은 자연의 힘을 기억하기 위해 나무를 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마더 네이처(Mother Nature)' 라는 말이 떠오르는 타 프롬이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지은 공간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절묘하다. 


코로나19로 세계가 얼어붙은 시절의 어버이날을 보내며.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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