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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May 15. 2020

#10 인도-차이나 틈바구니

누군가에게는 고작 하이픈(-)일 뿐


우리가 앙코르를 발견했다!


앙코르 왕국이 수코타이에 멸망한 1431년 이후 밀림에 묻힌 지 오랜 앙코르에 서양인들의 발길이 닿았다. 마침내 신비의 도시 앙코르가 '발견'되었다!


“우리가 앙코르를 발견했다.”라고 말하는 여러 탐험가들이 하나 둘 전해오는 밀림 속 신비한 도시의 소식은 대항해시대 유럽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각 지역에서는 앞다퉈 탐험대와 선교사를 보냈고, 그들의 보고서에는 서양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신기한 스케치와 자료가 가득했다.


16세기 포르투갈의 탐험가 디오고 도 코우토(Diogo do Couto, 1542?-1616)는 서양인 최초로 앙코르 여행기(Da Asia de Diogo do Couto)를 적었다. 그는 앙코르 유적을 로마나 이스라엘 등 서양 문명이 지었을 것이라는 글을 적었다. 당시 캄보디아인들의 문명 수준으로는 도저히 그런 위대한 유적을 지었을 리 없다는 서양인의 관점이 반영된 생각이었다.


디오고 도 코우토와 그가 지은 <아시아 기행>


1800년대 초 유럽에서는 급격한 산업혁명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극심한 빈부격차 등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유럽 밖으로 눈을 돌린다. 신기술을 동원해 영토를 차지하고 자원을 착취하는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 시대가 시작되었다. 국가 간 경쟁심을 바탕으로, 자원과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발달한 기술을 전파한다는 문명화 욕구와 만나 신제국주의는 급물살을 탄다. 아메리카가 대항해시대 식민지의 주무대였다면, 신제국주의 시대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그 무대가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런 배경에서 프랑스는 유럽 열강들의 틈에서 입지를 다지고 싶었다. 1851년 쿠데타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52-1870 통치)는 멕시코와 아프리카, 아시아로 세력을 넓혀 이전보다 두 배의 식민지 영토를 차지한다.



인도-차이나 완성!


베트남 응우옌(Nguyễn) 왕조의 혼란을 틈타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1853년 베트남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지정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베트남을 점점 손아귀에 넣던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선교사 박해를 이유로 1858년 베트남에 전쟁을 선포하고, 다낭(Đà Nẵng)과 사이공(Sài Gòn)을 점령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프랑스의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당시 캄보디아는 자신을 삼키려는 시암(Siam)과 안남(Annam) 사이에서 힘없이 흔들리는 상황을 겪고 있었다. 현재 캄보디아 왕조의 시조인 노로돔(Norodom Prohmbarirak, 1860–1904 재위) 국왕이 1860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즉위했지만, 내란을 진압하지 못해 2년 후 방콕으로 피신했다가 시암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국내로 돌아온다. 이듬해 1863년 캄보디아는 프랑스와 '수호통상과 프랑스의 보호에 관한 협약'을 맺고 프랑스 보호령에 들어간다. 프랑스는 안남을 점령한 상황에서 이제 시암과의 관계만 잘 정리하면 캄보디아까지 지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1884년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국고 세입권과 관세, 공공 사업권 등을 프랑스에 넘긴다는 조항이 든 조약을 맺는다. 노로돔 국왕은 반발했지만 왕궁 앞에 함선을 배치하는 등 프랑스의 위협에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국왕의 동생 시보타(Si Votha) 왕자가 프랑스에 저항 운동을 일으키지만 곧 진압된다.


이듬해 1887년 캄보디아가 프랑스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면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속한 프랑스 식민지 연방 '프랑스령 인도차이나(L'Indochine française, 1887-1953)'가 완성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포함된 지역. ⓒFlappiefh



식민지 박람회


신제국주의 식민지 개척에 발맞춰 식민지를 보유한 여러 나라에서 진기한 행사가 열린다. 이름하여 '국제 식민지 박람회(Exposition Coloniale Internationale).' 자국민에게는 새로운 문명의 예술과 즐길거리를 제공하면서 외국인들에게는 자국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장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민지에서 착취한 자원의 소비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고, 동물원처럼 사람을 전시하는 등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인종차별과 반인권 행위가 벌어지는 현장이었다.


프랑스 본토에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 수많은 식민지에서 '발견한' 유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찌감치 캄보디아를 차지한 프랑스는 당시 시암에 속해 있던 앙코르 지역을 1907년 반환받아 유적지 관리에 본격 돌입한다. (태국은 오늘날에도 앙코르 유적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태국 왕궁 한편에 놓인 앙코르 와트 모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1922년 마르세유, 1931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식민지 박람회에서 앙코르 와트가 '전시'되었다.



1931년 파리 식민지 박람회 포스터. ⓒmanhhai
1931년 파리 식민지 박람회 지도. 빨간 원 안에 앙코르 와트 모형이 보인다. (오른쪽은 확대한 모습) ⓒmanhhai


인도차이나 밀림 속에 숨겨 있던 앙코르 문명의 인기가 대단했다. 웅장한 힌두교 사원이 기독교 문명의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선 신기한 광경을 직접 보려는 인파의 행렬이 가득했다.



1931년 파리 식민지 박람회에 전시된 앙코르 와트 모형. 앙코르에서 가져간 진품 조각도 많이 전시되었다. ⓒmanhhai



식민지 박람회는 곧 식민지 관광으로 이어졌다. 산업혁명과 신제국주의로 쌓인 부에 더해 때맞춰 보급된 자동차는 대중의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충분했다. 무료 배포되던 미쉐린 가이드(Michelin Guide)가 1922년부터 유료 판매를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씨엠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양에서 온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그 많던 유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럼 식민지 박람회에 전시된 수많은 유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쉽게도 본국에 반환된 유물은 매우 드물다.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은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신제국주의를 펼치기 시작한 나폴레옹 3세 치하부터 1940년대까지 소장 품목이 급격히 증가한다. 그중 아시아관이 1945년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Guimet, 이하 기메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현재 프랑스가 보유한 크메르 유물을 보려면 파리 기메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캄보디아관 전경. 전시관 한쪽에 자리잡은 자야바르만 7세의 두상. ⓒsailko



기메박물관 한쪽에 전시된 자야바르만 7세 두상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띠고 있다. 세상 풍파를 다 겪었으나 누가 무어라 하든, 어느 곳에 옮겨놓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가 믿었던 부처처럼 그저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듯한 얼굴로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 같다.


프랑스는 무력으로 식민지의 자원과 유물을 소유했지만 사람들의 삶과 정신까지 갖지는 못했다. 박람회에 전시된 앙코르 와트는 겉보기에 훌륭한 복제품이었지만(실제 진품 조각도 많았고!) 크메르인들의 우주관을 담지 못했다. 앙코르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입구가 서쪽을 향하는 앙코르 와트는 파리 전시장 부지에 맞춰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우주의 대양을 상징하는 해자는 ㄱ자 작은 연못으로 대치되었고, 신화의 세계와 천체의 운행이 담긴 회랑은 온데간데없이 중앙탑만이 공원 복판에 쓸쓸히 놓여있을 뿐이었다.



인도-차이나 틈바구니는 고작 하이픈(-)이 아니다


'발견-점령-전시-소유'로 이어진 신제국주의의 행태는 오늘날 전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식민지 박람회 또한 인종우월주의와 문화우월주의를 낳은 시대의 비극으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인도차이나’라는 명백히 타자화된 단어는 지금까지도 그 지역을 예쁜 포장지처럼 환상과 신비로 감싸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는 인도와 중국 틈바구니의 ‘하이픈(-)’일 뿐인 그곳, ‘인도차이나(Indo-China)'는 인도도, 중국도 아니다. 이렇게 타자화된 틈바구니에도 독창성(originality)은 있는가?


분명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일부 지역에 자리 잡은 수많은 부족들이 오래전부터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 중 누군가는 독창성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나, 누군가는 험난한 근현대사를 겪으며 많이 잃어버리기도 했다.


이 글이 따라온 '문자'의 관점으로 보면, 캄보디아는 식민지와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도 자신들의 삶의 궤적과 생명력을 여태까지 잘 지켜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캄보디아보다 조금 일찍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은 어땠을까? 고대 크메르와 비슷한 시기 남인도에서 글자를 받아들였던 참(Cham)족은 그들의 문화와 문자를 서양 세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을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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