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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Mar 13. 2020

#1 언캐니 게이트

고푸라를 지나 신화의 땅에 들어서다

고푸라를 지나 신화의 땅에 들어서다

어릴 적 한 때 고고학자가 되는 꿈을 꿨었다. 이집트에서,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서 고대 문명들을 찾아내고 과거의 신비를 푸는 인디아나 존스 같은 고고학자 말이다. 어린이의 설레는 꿈에서 언제인지도 모르게 깨버렸지만, 모험 영화와 불가사의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앙코르 와트! 그 매력을 언젠가 내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캄보디아 씨엠립(Siemreap) 행 비행기 표를 끊은 뒤, 환상과 꿈의 세계에 머물던 앙코르 와트(Angkor Wat)를 실제로 만나기 위해 본격적으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책으로, 영상으로 미리 공부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유적 구석구석에 담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가이드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가이드가 바로 쏙(Sok, 가명) 씨였다.


가이드의 카톡 프로필 >_<


귀여운 카톡 프로필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카톡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투어 일정을 조율하고 비용을 협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가보지 않은 낯선 나라 사람과 내 모국어로 대화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과 만나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앞둔 대화는 금방 끝나고 기대가 생겼다. 쏙 씨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그는 어떤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을까?



캄보디아 씨엠립의 앙코르 유적 지도  ⓒHoliday Point in Flickr



어린이의 설렘으로 시작한 앙코르 투어 첫날,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더위가 벌써 한창이었다. 호텔 로비에 앉아 있을 때 한 캄보디아인이 다가와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이드 쏙입니다. 오늘 투어 예약한 분이죠?”

“(놀라며) 네...! 반갑습니다. 일찍 나오셨네요!”

이 먼 땅에서 한국말을 들어서 한 번 놀라고, 카톡으로만 얘기 나누던 쏙 씨의 유창한 발음에 또 놀랐다.

그와 함께 앙코르 톰(Angkor Thom)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한국에는 앙코르 와트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앙코르 와트는 수많은 앙코르 유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를 태운 차량은 씨엠립 시내를 빠져나가 쭉 뻗은 울창한 숲길을 달렸다. 한참을 달려 저 멀리 커다란 돌문이 눈에 들어오자, 차가 조용히 멈춰 섰다. 쏙 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앞에 보이는 문은 고푸라(Gopura)라고도 부르는 앙코르 톰의 남문입니다. 앙코르 톰은 한 때 100만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고대도시입니다. 가로, 세로 길이가 3km인 정사각형의 도시를 거대한 해자가 감싸고 있으며, 앞에 보이는 다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리 왼편에는 '수라(sura)' 또는 '데바(deva)'로 불리는 선한 신 쉰넷, 오른편에는 악한 신 '아수라(asura)' 쉰넷, 합쳐서 백팔 기의 거대한 조각상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두꺼운 뱀 ‘바수키(Vāsuki)’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안간힘을 쓰면서 힌두교의 창조 신화 '젖의 바다 휘젓기(乳海攪拌)'를 재현하고 있었다. 그 길 한가운데에 서니 줄다리기의 소실점이 만나는 가운데에 앙코르 톰의 남문, 고푸라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문을 지나면 마치 그 창조 신화의 원초성 한가운데로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앙코르 톰 남문 다리 오른쪽에 늘어선 악마 '아수라'. 저마다 표정이 다르다. ⓒ2017. Nohsungil
앙코르 톰 남문 ⓒ2017. Nohsungil


미소를 띤 채 사방을 굽어보는 고푸라의 거대한 얼굴을 보면서 다리를 건너고, 마침내 문을 통과해 먼저 건너와서 기다리고 있던 차량에 올라타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신화의 세계에 들어온 것인가.'  묘한 기분이 느껴지는 한편,『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얀 토끼>, 존 테니얼, 1890. ⓒpublic domain.
그때 갑자기 분홍색 눈을 한 하얀 토끼가 앨리스 쪽으로 뛰어왔다. 아주 특별히 이상할 건 없었다. 앨리스는 토끼가 “아, 세상에! 세상에! 이러다 늦겠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렇게 특별히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토끼가 급기야 양복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더니, 시간을 확인하고 급하게 달려가자 앨리스도 뛰기 시작했다. 토끼가 양복 조끼를 입고 있는 모습이나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는 모습이나 모두 처음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앨리스는 들판을 가로질러 토끼를 쫓아갔고, 이내 토끼가 산울타리 아래 커다란 토끼 굴 속으로 폴짝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다음 순간 앨리스도 토끼를 따라 내려갔다. 어떻게 다시 빠져나올 것인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저, 이소연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파주: 2017), 109-110.



문학 용어 가운데 ‘언캐니(uncanny)’라는 말이 있다. 등장인물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만났을 때 또는 이물감이 느껴지는 체험을 할 경우에 쓰인다. 이런 언캐니한 상황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반드시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가 만나는 문, 즉 '언캐니 게이트(uncanny gate)'가 등장한다. 앨리스가 빠졌던 '토끼 굴'처럼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의 '옷장',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의 ‘회오리바람’, 『해리포터(Harry Potter)』 시리즈의 '9와 4분의 3 승강장' 등 수많은 이야기에서 때로는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어떨 땐 잠에 들기도 하며 무언가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어떤 계기가 되는 지점을 지나 인물이 비현실 세계로 들어간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파도처럼 밀려드는 서울의 인파 속에서 숨 가쁜 하루를 시작하고, 어디서든 누구와도 연결된 모바일 사회에 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별안간 뱀의 왕이니, 창조 신화니,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말을 듣고 있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다. 너무나 '언캐니한' 상황, 그러고 보니 왠지 처음 겪는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에 들렀을 때 언캐니한 순간을 처음 만났다. 밀라노 외곽에서 지하철을 타고 두오모(Duomo) 역에 내려 지상으로 나왔다. 출구를 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의 위엄이란...! 광장 중앙에는 마치 중세 시대부터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광장 한복판에 높은 첨탑과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대성당이 서 있었다.


밀라노 대성당. 청동문을 지나 천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2016. Nohsungil


성경의 수많은 이야기가 새겨진 청동 문을 지나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육중한 문이 둔탁하게 닫히는 순간 주위가 갑자기 음소거되었다. 광장의 시끄러운 소리는 두꺼운 벽에 가로막혔는지, 끌리는 발소리조차 크게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를 따갑게 했던 광장의 소음과 대비되는 신성한 음악을 들으며 장의자에 앉아있는 동안, 장미 창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온 영롱한 빛으로 마음속까지 거룩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중세 시대 사람들도 나처럼 성당에 들어올 때마다 시간과 공간을 일순간 뛰어넘어 천상의 신비를 일부 맛보았으리라.


바이욘(Bayon) 사원 ⓒ2017. Nohsungil
바이욘 사원 한 쪽에서 만난 압사라 의상을 입은 여인. ⓒ2017. Nohsungil
ⓒ2017. Nohsungil



아득히 겹쳐지는 두오모의 기억과 함께 저 멀리 사라지는 앙코르 톰 고푸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시도, 서울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이제 나는 앙코르 톰 남문—언캐니 게이트—을 넘어 신화의 세계로 들어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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