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크메르 문자와의 조우
앙코르 톰을 모두 둘러보니 해가 중천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너무 뜨거운 시간에 투어를 진행하는 것이 무리라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숙소에 잠시 들러 쉬었다. 다시 승용차에 올라타 이번에는 꽤 먼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씨엠립 시내와는 사뭇 다른 농촌 풍경이 펼쳐졌다. 너른 들판이 길 옆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전통가옥들이 팜나무(Palm tree) 사이 군데군데 보였다.
좁은 길에는 팜나무 기름(Palm oil)과 팜 슈가(Palm sugar) 사탕을 파는 좌판이 도로를 따라 연이어 보였다. 달리는 차 안에서 가이드 쏙 씨에게 물었다.
“팜 슈가 사탕 맛있어요?” “맛없어요. 한국 사람들 안 좋아하는 맛이에요.”
관광객들이 얼마나 많이 물어봤으면 저러실까? 딱 잘라 맛없다는 그의 말에 웃음이 났다. 좁은 길을 지나 계속 초원이 펼쳐졌다. 차창 밖으로 지나는 좌판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니 먹어보지 못해 괜히 아쉬웠다.
씨엠립 시내에서 3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반테아이 스레이(Banteay Srei)’ 사원으로, 967년 야즈나 바라하(Yajnavaraha)라는 승려가 세웠다. 앙코르 왕조 멸망 이후 이름이 잊힌 채 방치되었으나, 이후 다른 사원에 비해 섬세하고 우아함이 남달라 ‘여성의 성채’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렸다.
한낮의 반테아이 스레이 사원은 선명한 붉은빛이 났다. 붉은 사암으로 지어져 다른 유적의 검은 사암과 확연히 다른 인상을 받았다. 우아한 부조가 특징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 부조를 천천히 감상하며 사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출입구 기둥 위에서 안정적으로 문을 지탱하게 해주는 린텔(Lintel, 상입방) 세밀한 조각을 넋을 잃고 보다가 기둥을 손으로 짚으며 지나가려던 차,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무언가를 확인해 보고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둥그런 글자가 양쪽 기둥 빼곡히 새겨져 있던 것이다. 그때부터 사원의 그 어떤 빼어난 조각이나 건축 양식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둥에 한참을 서서 글자를 이리저리 관찰하고 사진에 담았다. 씨엠립 거리에서 마주쳤던 정돈되고 날렵한 크메르 문자와 이질적일 정도로 둥글둥글 귀여운 모양에 눈길이 갔다. ‘이 글자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분명 귀여운 사람이 만들었을 거야.’
화려한 부조에 정신이 팔려 그냥 지나쳤다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사원을 둘러보는 중에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이 제법 길었다. 한낮의 때아닌 산책을 하고 있자니, 매표소부터 따라온 캄보디아 아이들이 “원 달라! 원 달라!(One dollar! One dollar!)”를 외쳤다. 앙코르 유적지 사진엽서 세트를 부채처럼 펼치며 하나만 사달라는 것이었다. '10장에 1달러라니, 인쇄 질도 나쁘지 않은데….' 두 세트를 사면서 캄보디아 인쇄 업계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인쇄 생태계는 어떤지, 가격은 어떤지...
반테아이 스레이 기둥에서 고대 문자를 만난 뒤, 방문하는 유적마다 글자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글자를 며칠 후 만났다.
씨엠립에서 멀리 떨어져 관광객들도 선뜻 코스에 넣지 않는 롤루오스 유적군(Roluos Group) 중에도 롤레이(Lolei) 유적은 인적이 가장 드문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수공사 기간이 오래되었고 유적의 상당 부분이 천막이 가려진 채 복원 중이어서 관광지로서의 매력이 다른 곳보다 적은 탓이다. 그래서 대부분 잠시 차에서 내려 빠르게 사진만 찍고 바콩(Bakong), 프레아 코(Preah Ko) 등 다른 유적으로 이동한다. 지금은 찾는 이가 드물지만 롤레이는 이래 봬도 앙코르 왕조의 첫 도읍지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의 초기 유적에 속한다.
앙코르 유적 폐장시간이 가까워올 무렵이 되어 발길을 재촉해 마지막 코스인 롤레이 유적에 도착했다. 듣던 것처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언덕을 올라 철골에 쌓인 채 한창 복원 중인 검은 사원을 만났다. 가이드 쏙 씨도 여긴 가볍게 들르자고 말해주어서 큰 기대 없이 둘러보기로 했다.
9세기 초반 벽돌로 지어진 사원에는 천 년을 이겨낸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링가(Linga)와 이어진 수로를 보니 이 사원은 시바(Shiva) 신에게 바쳐진 사원임을 알 수 있었다. 쏙 씨와 투어를 함께 하며 들은 지식이 나도 모르게 쌓여 있었다.
며칠째 이어진 투어로 화려한 사원들과 고즈넉한 고대 도시의 감흥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작고 특별할 것 없는 롤레이 사원에서 돌아가려는 내 발길을 붙잡은 것은 새까만 글자였다. 반테아이 스레이에서 봤던 동그란 문자들이 문 기둥에 한 가득 새겨져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는지, 새까만 돌 위엔 글자가 매끈하고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반테아이 스레이 보다 더 단단한 돌이기 때문일까? 글자 모양이 선명하고 새겨진 깊이도 일정했다. 글자를 한참 들여다보면서 몇 가지 특징을 찾았다.
1. 각진 모서리가 전혀 없다.
2. 획의 굵기가 모두 일정하다.
3.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나선형이 많다.
4. 반시계 방향으로 90도 회전한 '3'자 형태가 글자 위쪽에 반복된다.
'어떻게 모든 글자가 각이 없이 둥글 수 있지?' 반테아이 스레이에서는 누가 이 글자를 만들었는지 궁금했다면, 롤레이 글자를 보면서는 ‘어떻게 썼길래 이런 형태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크메르 문자의 배경을 너무나 알고 싶어 졌다. 롤레이를 떠난 뒤로 캄보디아 글자들이 본격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