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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Oct 29. 2022

길 위의 현타 극복기

Part3. 슬기로운 집 없는 생활 - 3

캠핑카 구석구석을 애증으로 가꾸는 동안 바퀴 달린 집은 점점 사람 사는 모양새를 갖춰갔고, 일상의 루틴을 회복하자 혼돈 그 자체였던 생활도 정돈되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도 가야 할 곳도 없는 사부작 거리기 좋은 날에는 데크 만들기, 온수기 교체, 블라인드 수리와 같은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완성했다. 일이 끝나고 사방이 창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식탁 겸 책상 겸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나눠마실 때면, 현재의 삶이 꽤나 만족스러웠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실없는 소리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현타, 즉 현실 자각 타임은 삶의 곳곳에서 불시에 찾아와 나의 나약한 마음을 뒤흔들곤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유튜브 요리 영상을 섭렵하는 취미를 갖고 있던 남편은 캠핑카 생활이 시작되자 캠핑카를 고치는 영상만 주야장천 보기 시작했고, 나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는 RV Renovation으로 가득 찼다.

RV를 사서 직접 내부를 완전 리모델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캠핑카에 살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특히 굳이 굳이 이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첫째, 오래된 RV들은 사이즈나 기능에 비해 굉장히 저렴하기 때문이다. 신혼집으로 RV를 선택한 어느 젊은 유투버 부부가 기능적으로 큰 문제도 없고, 성인 둘이 지내기에 넉넉한 크기지만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빈티지 트레블 트레일러를 단 돈 5천 불에 구입했다는 얘기를 하는 걸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5천 불이면 우리의 첫 번째 RV였던 작고 화장실도 없던 팝업 트레일러보다도 저렴한 가격이었다.


어글리 RV 변신의 정석


꾸준히 관리하거나 리모델링을 하지 않는 이상 10년 이상 된 RV가 좋은 상태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거주가 목적인 집과 달리 RV는 이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면 가벼운 내장재를 써 무게를 줄이려고 한다. 빌트인 된 가구나 가전이 가볍다는 것은 그만큼 내구성이 약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더해 이동을 하는 중 나사가 빠지고, 물건에 부딪혀 벽이 손상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동 중 어쩌다가 예기치 못한 비포장 도로라도 만나는 날에는 울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그래서인지 캠핑장의 퀄리티를 관리한다는 일부 RV Park들은 10년 이상된 RV는 받지 않거나, 관리가 잘 되어있는 것을 사진 등으로 증명해야만 예약을 받아주기도 한다. 이 역시 캠핑카에 살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RV의 인테리어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또 다른 이유는 업그레이드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이 RV에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 많은 RV 제조 회사들이 만들어내는 순정 인테리어는 촌스럽기 그지없다. 처음에는 이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미국 스타일인가 의심했지만, RV 리노베이션을 멋지게 해낸 유튜브의 댓글 창마다 미국인들도 나와 같은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어글리 디자인을 고수하는 RV회사들아 이것 좀 보고 배워라!"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어글리 그 자체였던 우리의 예전 캠핑카(팝업 트레일러). 최소 1995년 디자인으로 보이지만 (특히 저 소파와 체리색 우드가), 놀랍게도 2015년식이었다. 


이런 오랜 원성이 접수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집이 되어줄 캠핑카를 찾는 여정 중 만났던 수많은 후보들 중 그나마 2020년 이후의 RV들은 인테리어 트렌드를 따라 체리와 월넛톤을 버리고 그레이와 블랙이 믹스된 모던한 느낌을 많이 살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글리와 모던의 경계에 있는 2018년에 태어난 우리 캠핑카는 심미적 차원에서 약간의 보수 공사가 분명히 필요했다. 


그런 의미로 시작한 RV 레노베이션 영상에 대한 탐색은 정보를 얻는다는 측면에서는 다소 유익했지만, 완벽한 리모델링을 통해 거듭난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남의 캠핑카를 엿보다 보니 한동안 잠잠했던 '비교하는 습관'이 소환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캠핑카에서의 삶이 편안해졌고, 캠핑카 생활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인 언제든 어디로든 훌쩍 떠날 수도 있는 자유는 항시 종종거리며 살던 내 마음에 쉼표를 찍어주었다. 

삶의 결이 달라져 버리자 집을 소유한 사람들과의 비교, 집에 사는 사람들과의 비교를 멈추게 되었다.

그 후련한 해방감도 잠시, 내 마음은 또 다른 비교 거리를 끈질기게도 물어다 내 앞에 던져두었다.


"그래 집 없이 사는 것 괜찮지. 근데 이왕 RV에 살 거면 저렇게 잘 꾸미고 살아야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지."라는 비교가 마음을 잠식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이 공간을 예쁘게, 보기 좋게 꾸밀까 고민하고, 아마존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주문하고는 했다. 

그러고 나서 도착한 물건을 한참을 구석에 놓았다가 이리 대보고 저리 대보다 보면 결국 우리 캠핑카에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아 반품을 하고 다시 쇼핑을 시작하는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를 몇 번인가 반복하다 깨달았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도 '남을 위한 꾸밈 노동'을 반복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날씬한 몸과, 잘 차려입은 옷, 정돈한 피부와 단점을 잘 커버한 화장 등으로 외적인 모습을 꾸미는 일 자체가 꾸밈 노동이라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자기 자신을 꾸미는 일, 정원을 꾸미는 일, 집을 꾸미는 일 모두 나의 색을 찾는 여정이자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즐거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정과 결과가 같을 지라도 '꾸밈'이 '꾸밈 노동'이 되어버리는 한 뜻의 차이는 바로 그 동기가 어디서 오느냐이다.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라는 밖으로부터 시작되는 꾸밈은 더 이상 그 순수한 꾸밈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노동으로 변질된다. 


맘에 쏙 드는 욕실매트를 하나 바꾸고, 누랬던 욕조를 뽀득뽀득 하얗게 닦고, 커피머신과 에어프라이어를 올려놓을 작은 선반 하나는 놓는 것처럼 꾸밈이라고 얘기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소소한 공간 꾸밈을 할 때의 목적은 하나였다. 우리 가족에게 잘 맞는 편안한 공간이 되도록 쓸고 닦고 다듬고 싶었고, 작은 변화만으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멋들어진 RV레노베이션 영상을 보면 볼수록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이란 기준은 '남들에게 감탄을 주는'으로 바뀌었고, 캠핑카를 꾸미는 일은 그렇게 몸은 축나고 스트레스만 남는 업무의 연장이 되었다.


세련된 예쁨과는 거리가 멀지만 깨끗하고 잘 작동하는 2018년식 캠핑카. 저 할머니 집 갓도 보다 보니 정이 든다.

꽤 괜찮은 연식을 가진 우리의 캠핑카는 바닥도 벽지도 모두 깔끔하고 가구 컬러도 조금은 올드하지만 자연스러운 연한 우드톤이다. 실제로 나는 이 컬러를 좋아한다. 

고장 난 블라인드나 선반이 있었지만 모두 싹 고치고 나니 이제는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소파가 조금 어글리 하고 군데군데 전 주인이 남긴 못 자국이 거슬리긴 하지만 당장 급하게 바꿀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여도 급하게 이 작은 공간을 예쁘게 만들지 못해 안달 났던 건, 저 영상 너머 예쁘게 꾸민 캠핑카를 자랑하는 이들이 부러웠고, 그 밑에 달린 댓글처럼 "내가 본 최고로 예쁜 RV! 집보다 더 집 같은 RV!"와 같은 누군가의 감탄과 인정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여행이 아닌 일상을 보내며 새로운 사람들을 점점 만나게 되었고, 캠핑카에 산다는 얘기를 하면, 한번 놀러 와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생겼고, 이 공간에 누군가가 방문할 거라 생각하니 집을 꾸며야겠다는 마음은 한층 더 조급해졌다. 


실제로 예전에 집에 살 때는 이사를 하고 나면 집이 정리되고, 집 분위기에 맞는 인테리어가 완성될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은 집만큼 꾸며지지 않은 모양새를 보는 것이 스트레스였고, 새로운 집에 어울리는 물건들을 쇼핑하고 분위기에 맞추어 꾸미는 것까지가 끝나야 사람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고, 집이 참 예쁘다. 잘 꾸몄다 등의 입바른 칭찬을 들으며 마음을 놓았다.

캠핑카에 살며 달라진 점은 집들이 따위를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고, 캠핑카 생활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물건에 대한 욕망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작은 공간에 살며 청소와 정리의 굴레에서 벗어난 뒤에는 가능하면 일을 벌이지 않는 방향으로 가용 시간을  최대한 늘려 유유자적, 하릴없이 지내는 삶의 매력에 빠졌다. 

한마디로 나는 더 이상 사는 공간을  남보기에 번지르르하게 꾸미는데 열정적일 필요가 없었고, 그런 곳에 열정을 쏟고 싶은 열정도 없는 상태였다. 

남보기에 멋진 공간은 아닐지언정 나에게 충분히 편안한 공간이라면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놓였다.


RV 레노베이션 영상 시청시간을 줄이고, 아마존 쇼핑도 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또 예쁜 공간에 대해 미련이 생긴다면 일단 시간을 들여 깨끗하게 그곳을 청소해본다. 신기하게도 쓸고 닦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 들었던 것들이 보기에 그리고 쓰기에도 꽤나 괜찮아지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한 곳씩 한 곳 씩 아주 천천히 나의 취향을 담아 꾸며본다. 취향을 가지고 사는 것,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잃지 않아야 할 인생의 방향성이자 인생의 가장 큰 활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향만 나로부터, 안으로부터 제대로 출발할 수 있다면 속도는 더 이상 고려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 캠핑카 생활을 정리하고 집이라는 주거형태로 돌아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거취의 문제는 살면 살수록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다. "정말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긴 할까?"라는 주제로 남편과 열띤 토의를 해보지만 결론은 아직 알지 못한다. 

길 위에서 살면 살수록 알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살면서 분명히 알게 되는 것도 있다. 

앞으로 우리가 어디에 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사는 곳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조금씩 더 명확해진다. 

이 시간들이 내 안에 잘 쌓인다면 다음으로 살게 될 공간이 어디가 되었든지 간에 그곳에서는 좀 더 나답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길 위의 현타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극복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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