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도시의 심장부, '한가람 개발'의 120층짜리 초고층 빌딩. 지하 30층, 지반 통합 관제 센터.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차가운 공간에서 이건호는 컴퓨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직함은 ‘한가람 대학교 지질공학과 연구원’이었지만, 사실상 그는 3년 전의 참사 이후로 세상과 스스로를 격리시킨, 잊힌 존재에 가까웠다.
3년 전, 그는 도시의 거대한 지하 도시, '하이드로 프로젝트'의 핵심 지반 분석 팀원이었다. 그의 분석은 명확했다. 공사를 강행하면 연쇄적인 지반 침하가 발생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거대 기업의 로비와 정치적 압력에 묻혔고, 그의 예측대로 대형 참사가 터졌다. 도시의 일부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건호는 그날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죄책감이라는 잔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제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데이터를 믿고, 기계를 믿을 뿐이다. 그저 컴퓨터 화면 속에서 과거의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일과이자, 스스로에게 부과한 속죄였다.
평온했던 이건호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관리하는 도시의 지반 센서 데이터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된 것이다. 모니터 화면에는 3년 전 그가 보았던 불안정한 패턴과 너무나도 흡사한 그래프가 그려지고 있었다. 미세한 진동, 토압의 불규칙한 변화, 그리고 지하수 수위의 급격한 변동. 이건호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컴퓨터 화면을 노려봤다. 그의 트라우마가 잊히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심장이 거세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가 외면하는 순간,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건호는 3년 만에 처음으로 관제 센터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낡은 배낭을 챙기고, 오랜만에 햇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3년 전 참사가 일어났던 '하이드로 프로젝트' 현장 주변이었다. 그곳은 여전히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이건호는 펜라이트를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땅을 살폈다. 그의 불안감은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지반 곳곳에 미세한 균열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그는 휴대용 지질 분석 장비를 꺼내 땅에 박고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지하의 미세한 진동은 이미 지표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는 과거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며,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재앙의 징후를 읽어내고 있었다.
이건호는 낡은 배낭을 멘 채 '한가람 개발' 본사로 향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빌딩에 들어선 건 3년 전, 모든 것을 포기하던 날이었다. 로비의 안내 데스크 직원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강동식 박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건호라고 전해주세요." 강동식. 그를 믿어주던 유일한 동료이자, 3년 전 그의 경고를 묵살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강 박사는 이건호의 데이터를 보자마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호, 자네 말이 맞았어. 이대로라면 도시 전체가 위험해.” 그들은 함께 상부에 비상 사태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3년 전과 똑같은 냉대와 무시뿐이었다. 이건호와 강 박사는 회의실에 불려 갔다. 회의실 테이블에는 그들을 쫓아냈던 임원들과 현재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젊은 책임자들이 앉아 있었다. "또 시작이군, 이건호. 한 번 실패했다고 평생 징징댈 건가?" 임원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맴돌았다. 이건호는 분노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이건 실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데이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공사를 중단하고 지반 보강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봐, 이 박사. 자네 때문에 우리 회사 예산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아? 제발 좀 조용히 하게." 젊은 책임자는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이건호가 지적한 지반의 불안정성을 '경미한 문제'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건호는 좌절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싸워가며 모든 이들에게 경고했다. 그는 도시의 안전 시스템을 총괄하는 책임자에게 찾아가 무릎 꿇고 부탁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이건호는 과거의 실패에 사로잡힌,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의 경고는 또다시 묵살되었고, 그는 무력감 속에서 도시의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