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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경섭 Oct 03. 2021

코미디 극작가가 되었다

의도는 없었다

코미디 극작가가 되었다


이럴 의도는 없었는데 코미디 극작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니요. 사실 제 자신을 코미디 극작가라고만 규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기 PR 시대를 살아가며 자주 접하는 퍼스널 브랜딩 또는 자기 계발 책에서 하나 같이 말하는 가르침이 “한 문장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라서 일단은 제 자신을 코미디 극작가라고 정한 것뿐입니다.


유튜브에서 100만 조회수를 기록한 <dxyz>의 햄버거편.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를 실제로 만나본 분들은 제가 코미디를 쓴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겁니다. 굉장히 무뚝뚝하거든요. 근데 제가 무뚝뚝하게 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들어보시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거나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저는 머릿속으로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다’ 또는 ‘이렇게 행동하면 웃기겠다’ 생각이 들어 행동으로 옮겨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 만, 동시에 이상한 녀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시트콤 ‘오피스’의 마이클 스콧(스티브 카렐)처럼 제멋대로여서 짜증을 유발하는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한다면 어떨까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준하(정준하)처럼 단순 무식한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한다면 어떨까요? 시트콤 ‘IT 크라우드’의 로이와 모스(크리스 오다우드, 리처드 아이오아디)처럼 답답한 너드를 만난다면 어떨까요?



그 외에도 여러 시트콤이나 코미디 장르에서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부족한 모습을 아주 극대화한 ‘괴짜’들이 나옵니다. 그 괴짜들을 통해 황당무계한 상황을 만들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지요.


괴짜 등장인물들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 심지어 밉상이기까지 한 그들의 모습을 시청자들이 당황하거나 기분 나쁘지 않게 보고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등장인물들과 멀리 떨어진 시공간, 즉 화면 밖에서 그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극 안의 상황과 인물이 가짜인 것을 아는 시청자들은 심리적, 물리적 거리감이 확보되어 마음 놓고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황당한 상황을 즐길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동물원에서 철창 안에 갇힌 맹수를 보고 귀여워할 수 있는 이유와 비슷할 겁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괴짜들. 단 한 명도 부족함 없는 괴짜들이다. / 시트콤 <브루클린 나인나인>


가상세계에서나 허용되는 괴짜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실천했습니다. 그 캐릭터가 하나로 고정된 것도 아니었기에 어떨 때는 ‘마이클 스콧’ 같은 사람이 되고, 다른 때는 ‘이준하’ 같은 사람, 때로는 ‘로이’와 ‘모스’ 같은 사람이 되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일종의 ‘연기’를 한 것뿐이었지만, 남들의 눈에는 제가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온 괴짜로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이제는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웃음을 주는 행위의 무게감과 책임감을 알게 되었달까요.


매번 모두를 웃길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가끔은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누군가의 무례한 농담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고요. 경험을 통해 성찰을 하며 모두가 빵빵 터지더라도 1명이라도 불쾌감을 느껴 웃을 수 없는 혐오와 차별이 담긴 농담이라면, 실패한 농담이라는 신념이 생겼습니다. 이 기준을 맞추기란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만, 웃음을 주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이 없는 농담을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도 꾸준한 공부를 통해 윤리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즉흥적인 농담은 당연히 윤리적 고민을 충분히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농담뿐만 아니라 말도 더 아끼게 되었고요. 이게 제가 무뚝뚝해진 이유입니다. 이유가 너무 뻔하죠?  


하지만 언제나 제 머릿속에는 괴짜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에도 진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웹드라마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부터 있던 웹드라마계의 조상 ‘72초(칠십이초)’라는 웹 콘텐츠 제작사에 입사를 해 대본 쓰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머릿속에 가득한 황당무계한 아이디어들을 극이라는 가상세계 안에서 구현하는 일, 대본 쓰는 일을 하게 된 것이죠. 정말 재밌었습니다. 드디어 제게 맞는 업의 범주에 발을 디딘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대본을 쓰는 일을 ‘제게 꼭 맞는 일’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일이 기대된다기보다는 오늘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저는 글을 쓰는 일과 무관한 디자인 전공자입니다. 디자인과 드라마 작가. 두 분야 사이에 접점이 없어 보이는 만큼, 두 분야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징검다리처럼 수많은 고민과 선택이 있었습니다.


선택을 하고 난 뒤 어느 정도 성과를 보고 나면 ‘이다음에 또 뭔가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What’s Next?” 대본을 쓰는 일은 이전에 경험했던 일들보다 훨씬 큰 만족도를 가져다주었지만, 여전히 이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제가 평생 가져갈 업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재미와 웃음을 주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목표가 조금 더 선명해졌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굳이 ‘대본’으로 한정 짓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본을 쓰는 일로 5년 차인 지금, 대본을 쓰는 일만으로는 제가 원하는 재미난 미래를 충분히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드라마 업계의 미래를 보는 저의 관점 때문인데, 이에 대한 저의 비천한 생각도 차차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듯, 미래에 제가 여전히 코미디 작가 일지 확신할 수 없기에 저의 소개 앞에 ‘오늘은’이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성공학이나 행복학을 다루는 자기 계발서에서는 당장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만족한 하루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다가는 사나 죽으나 미래가 없는 건 마찬가지 같죠? 그래서 저는 오늘을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를 꿈꾸렵니다. 저는 오늘 행복하기 그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부처가 말했거든요. 인생은 원래 수행의 과정이라고. 인생의 고통과 재앙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서 관찰하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해탈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역시,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다 쓰고 죽지도 못할 돈을 벌어서 ‘물질은 역시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이 조금 힘들어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오늘을 보내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의 표정에는 아마 웃음기가 없으실 겁니다. 고로, ‘오늘은 웃음기 없는 코미디 극작가’라는, 저를 설명하는 한 문장이 완성되었습니다. ‘나를 소개하는 한 문장 만들기’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오늘은 웃음기 없는 코미디 극작가


앞으로는 제가 작업한 작품들을 하나씩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 자신도 돌아보며 저의 포트폴리오를 공유하는 셈이죠. 굳이 왜 공유하냐고요? 좋은 일자리나 업무 제안 미리 감사드립니다.


글은 주로 아래 주제를 다룰 것 같습니다.


* 코미디 대본을 쓰며 겪은 경험과 고민의 흔적 공유 (#일 #작업노트)

* 터득한 대본 작성 노하우나 코미디의 공식  (#노하우)

* 디자인 관점에서 대본 쓰기


그렇지만 막상 쓰려고 할 때 아이디어가 없으면 다루지 않겠습니다. 부담 없이, 의무감 없이,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적어가려고 합니다. 포트폴리오라고는 말했지만, 요즘 느끼고 있는 번아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시작하는 일입니다.


2020년 9월 초에 시작해서 2021년 9월 말까지. 길어봐야 10분이 넘지 않는 숏폼(Short Form) 대본만 쓰던 제가, 30분짜리 12편으로 구성된 미드폼(Mid Form) 드라마 대본을 얼마 전에 탈고했습니다. 우당탕탕, 좌충우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속도감 있는 전개의 블랙 코미디고, OCN에서 방영한 드라마 ‘구해줘’ 제작사인 ‘히든시퀀스’에서 제작될 예정입니다.


해본 적 없던 큰 프로젝트를 1년 동안 하고 나니 기운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멈추고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지요. 저는 이 일을 계속하게 될까요? 포트폴리오를 모두 쓰고 나면 마음이 결정되길 바랍니다.


부처는 온전한 전체 안에서 살라했습니다. 내가 믿는 이분법적 관념에서 벗어나 전체를 바라보라 했습니다. 무교임에도 자꾸 부처를 들먹이는 이유는 최근 반야심경을 접하고 흠뻑 빠져버렸거든요. 반야심경을 해설해주는 책 딱 한 권 읽었을 뿐이라 조금 부끄럽지만, 당연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죠. 제가 최근 읽은 책의 문장 공유드리며 오늘 글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우리는 관념과 사고방식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실제로는 아주 자유롭고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떠올린 생각 하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불편해한다. 막다른 길에 가로막혔다는 생각이 들 때,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관념 바깥에 수많은 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유일한 길 바깥에 무한한 세계가 있다.
책 ‘반야심경 마음공부’ 중.


다음글 :

1화  |  코미디에도 공식이 있다? 



소경섭

2017 - 2021  | 웹 콘텐츠 제작사 '72초' 근무


[대표작품]

2022  |  해프닝 (예정)

2020  |  tvN 롤러코스터 리부트 – 가족의 초상

2017 - 2020  |  dxyz


[수상 & 노미네이트]  

2021  |  가족의 초상  |  아시안 아카데미 크리에이티브 어워즈 / 베스트 숏폼 National Winner

2021  |  가족의 초상  |  프랑스 시리즈 마니아 / 숏폼 경쟁부문 노미네이트

2020  |  dxyz  |  아시안 아카데미 크리에이티브 어워즈 / 베스트 숏폼 National Winner

2019  |  dxyz  |  국제 에미상 / 숏폼 시리즈 부문 노미네이트

2019  |  dxyz  |  멜버른 웹페스트 / 베스트 국제 코미디상

2019  |  dxyz  |  아시안 아카데미 크리에이티브 어워즈 / 베스트 숏폼 Regional Wi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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