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경섭 Oct 12. 2021

웃기는 게 일이라서

코미디에도 공식이 있다?


- 남을 웃기는 건 제게 일이 되었습니다. 웃기는 일도 직업의식을 갖고 굉장히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 저의 첫 대본이 영상화가 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시나리오 작법을 독학하던 방구석 몽상가


산업디자인학부생이던 당시 저는 졸업을 미룬 상태로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고 ... 연장할 수 있는 휴학 기간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안에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저는 어릴 적 꿈이었던 만화가를 해보기 위해 웹툰 작가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범위가 아닌 부분을 공부하는 녀석처럼 만화를 그리는 일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푹 빠져서 시나리오 작법 공부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막연히 대본 쓰는 일에 관심을 가졌죠.


그러던 중 우연히 ‘72초 드라마’를 알게 되었고, ‘72초’라는 회사를 알게 되었고, 72초의 초창기 IP 중 하나인 ‘두여자’라는 콘텐츠를 알게 되었습니다. ‘두여자’는 괴상한 콘텐츠였습니다. 이딴 걸 누가 봐? 제가 봤습니다. 여러 번 봤습니다. ‘두여자’는 좋은 의미로 괴상합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리듬감 있게 대화를 주고받는 연출과 따뜻한 색감에 아기자기하고 키치한 미술이 돋보이는, 어디서도 볼 수 없던 독특한 형식의 콘텐츠였습니다. 마니아층이 두터웠고 저도 그 마니아 중 한 명이었죠.


더는 졸업을 미룰 수 없게 되어 어딘가에 취직해야 한다면 72초에 입사하고 싶었습니다. 경력이 없어서 대본을 쓰는 일은 못 하겠지만, 전공을 살려 미술팀으로라도 72초에 입사하고 싶었습니다. 독특한 영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안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두여자를 위한 ‘기획팀’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습니다. 당시 웹드라마 시장을 선도하던 72초답게 독특한 지원과제가 있었습니다. 과제가 재미있어 보여서 지원했고,  최종적으로 제가 새로운 기획팀으로 뽑혔습니다. 시나리오 작법을 혼자 공부한 게 전부인 제가 ‘기획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두 여자를 다시 태어나게 하기?


제가 입사했을 때, 시즌 2을 마친 ‘두여자’팀은 이름을 ’dxyz’로 바꾸고 새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바꿀 만큼 이전 시즌들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dxyz의 뜻은 'deux yeoza'의 줄임말입니다.)


시즌 2까지의 ‘두여자’ 형식을 설명하자면, 굉장히 독특하고 독보적인 형식을 가진 콘텐츠입니다.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 두여자 시즌1 통합본 보기 : https://youtu.be/pV2aVcrqY2U ]

‘두여자’는 고유명사로, 띄어 쓰지 않습니다.


‘두여자’는 제목 그대로 주인공인 두 여자가 나오고, 그녀들을 마주한 제삼자가 나오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주인공인 두 여자가 사실은 한 사람이라는 것! 한 사람 내면의 갈등을 두 여자를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두 여자는 항상 나란히 있고, 제삼자가 맞은편에 있는 겁니다. 두 여자는 사실 한 사람이기 때문에 둘은 서로 마주 설 수 없죠! 이 사실을 알고 봐도 말이 되고, 모르고 봐도 말이 되죠? 신기한 형식을 가진 콘텐츠입니다.


이런 독특한 콘텐츠를 창작한 ‘두여자’ 팀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두여자’ 시즌 2까지 보시면 아시겠지만, 구도가 평면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 때문에 등장할 수 있는 인물 수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콘텐츠의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 있었는데요, 이 규칙에 관한 내용은 또 한 분량 차지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아무튼, 시그니쳐가 될 만큼 독창적인 형식이 오히려 콘텐츠의 확장성을 막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dxyz'팀은 두여자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어했습니다.


‘dxyz’로 시작하는 새로운 시즌의 목표는 이러했습니다.


두여자의 개성은 유지한 채,

(사실은 한 사람이었던) 두 여자를 개별의 인격체로 나누고,

평면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이를 통해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게 만들기.



재밌게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저를 포함한 ‘dxyz’ 팀은 ‘두여자’의 형식을 벗어나기 위해 완전 처음, 백지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건 재미있는 콘텐츠이고, 그 재미의 기준은 웃음을 주는 것이고, 그건 곧 ‘코미디’였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국내외의 많은 코미디 영상을 보며 스터디를 했습니다.



코미디에도 공식이 있다?


SNS에 돌아다니는 유머 영상들을 포함해 수많은 코미디 콘텐츠를 보면서 몇 가지 패턴을 찾을 수 있었고, 저희만의 공식으로 정립했습니다. 그때 만든 공식들이 6~8가지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공식을 몇 가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링크한 영상을 보시면 이해가 더 쉬우실 겁니다. 한글 자막이 없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있으실 겁니다.)



1. 확장

황당함이 점점 커져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구조입니다.


[ 키 앤 필  – 모자 대결 ]

Key & Peele - Dueling Hats

https://youtu.be/5pKt4gaErvU


영상 길이 : 2분 9초

영상 내용 : 친구가 새로 산 모자를 보고 부러워합니다. ‘텍(Tag)’을 떼지 않는 게 쿨하게 느껴지죠. 그래서 다음날 자신은 더 쿨해 보이기 위해 텍도 떼지 않고 구매한 봉지째 머리에 쓰고 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점차 산으로 갑니다. 




2. 나열

‘~할 때 공감’ 또는 ‘~와 ~의 비교’ 아니면 ‘하우투’ 등, 한 가지 큰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나열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 골든 무스터치 – 영화 vs 현실 ]

Golden Moustache - Movies vs. Life

https://youtu.be/yN38y5MILbs


영상 길이 : 2분 17초

영상 내용 : 영화 속 장면들이 현실에서 일어났을 경우를 비교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비교방식의 유머, 개그콘서트 같은 곳에서도 많이 보셨죠?




3. 전이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이 평범하게 전개되다가 점점 산으로 가는 방식입니다.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간다는 점은 ‘확장’과 같지만 둘의 차이점은, 확장은 무언가가 축적되거나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전이’는 개념이나 대상이 변동되는 느낌입니다.


[ 스튜디오 베이글 – 체크아웃  ]

Studio Bagel - Check Out

https://youtu.be/G6zTPx97vO0


영상 길이 : 2분 42초

영상 내용 : 호텔 체크 아웃을 위해 기본적인 질문을 하다가 점점 퀴즈를 내는 등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 골든 무스터치 – 계약서 ]

Golden Moustache - Le contrat

https://youtu.be/zKEaYupilaU


영상 길이 : 1분 45초

영상 내용 : 계약서를 주며 ‘여기에 사인해주세요.’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기’라는 대상이 점차 황당무계하게 변해갑니다.




4. 치환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을 평범하지 않은 상황과 치환하는 방식입니다.


[ 스튜디오 베이글 – 응급실 ]

Studio Bagel - Urgences

https://youtu.be/6AU1sZ10jZA


영상 길이 : 4분 31초

영상 내용 : 생활 속에서 고민되는 머릿속 상황을 응급실의 응급상황으로 치환했습니다.

답장하기 난처한 문자메시지를 받은 환자가 “어떻게 답장하죠?”라고 물으면 의사가 대신 좋은 답장을 해주거나, 환자가 “셀카 잘 찍는 법을 모르겠어요!”라고 걱정하고 있으면 의사가 좋은 셀카 각도를 잡아주는 식이죠.


하나도 긴박할 게 없는 일상 속 평범한 상황을 엄청 긴박한 응급실 상황으로 치환함으로써 두 상황에서 오는 간극만큼 크게 다가오는 황당무계함이 유머 포인트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공식은 여기까지입니다. 적다 보니 우연히도 난도가 높은 순으로 적었네요. 치환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치환했을 때 가장 재미있을 두 상황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찾더라도 두 상황의 간극이 크지 않아 밋밋하거나, 어울리지 않거나, 간극이 크더라도 다소 억지스러울 가능성이 컸습니다.


이렇게 공식을 알았으니 dxyz팀은 공식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코미디를 만들 수 있었겠죠? 아니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공식으로는 코미디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코미디처럼 보일 순 있었지만, 재미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다음화 : 농담의 조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