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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로 '나'를 소개하다

그리스어 배우기

by 그릭아낙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리스어를 배워야겠다는 강한 동기가 생겼다. 셰프의 친구나 형제들은 필자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셰프의 부모님은 내가 아는 한국의느 부모님처럼 모국어만 가능하다. 3형제 중 막내인 셰프가 일등으로 장가를 갔다. 그래서인지 첫 며느리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으신가 보다. 필자에 대해 셰프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시며, '며느리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필자도 시어머니와 알콩달콩 지내는 사이를 꿈꿨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어로 유창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몇몇 그리스 사람들은 셰프와 필자가 왜 그리스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는지 의문을 갖는다. 경제위기로 그리스를 떠나고 싶어 하는 셰프의 지인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그리스어를 배우려고 해?" 필자와 셰프는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기로 했다. 자연과 동화되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셰프의 어린 시절을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었고, 삶에 철학이 담긴 그리스는 아직 이기주의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곳이기에 이런 따뜻한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난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려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어를 못하면 어째?"라고 대꾸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동기를 가지고,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경제적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지만, 사람과 사람이 사는데 '돈'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점점 세금이 비싸지고 있어 주머니가 가벼워지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과 그리스어로 자유롭게 소통하며, 알콩달콩 지내는 날이 온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게 또 있을까.


수료식 당일 수료증을 받고 기뻐하는 필자와 선생님, 로자

시부모님과의 즐거운 대화를 상상하며 그리스에 오기 한 달 전부터 그리스어 독학을 시작했다. 요즘엔 인터넷이 정말 잘 발달되어 있어서 독학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리스어를 독학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남편이 그리스 사람인데, 남편한테 배우지 않고?"라고 물을 수 있다. 원래 가족에게 무얼 가르친다던가 배우는 것은...... 부부가 등을 마주대고 하룻밤을 보내거나 큰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다. 그래서 셰프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운다는 생각은 일찍이 접었다. 영어로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사이트가 있다. 덕분에 독학으로 그리스어 알파벳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큰 수확이다. 이후, 혹시 한국어로 그리스어를 배울 수 있는 교재가 있을까 해서 광화문에 있는 큰 서점으로 향했다. 스웨덴어, 네덜란드어, 헝가리어... 어라? 왜 그리스어를 배울 수 있는 책은 없지? 진정 한국에서 그리스어를 배우는 수요는 없단 말인가? 아니면, 공급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한 것인가? 충격이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가 해야겠다고. 한국에서 그리스어를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어 자료를 해야겠다고. 그러려면 유창한 수준에 그리스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리스어 학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관들이 이미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 중간에 필자를 받아 줄 수 없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알파벳을 읽고 쓸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선생님을 찾았다. 수업이 일주일이나 진행되었지만, 다행히도 나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한국에서 독학을 하고 온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수료장을 받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양볼에 키스를.


필자가 다녔던 사립학원은 외국인을 위한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최초의 학원이다. 35년 전에 설립되었고, 나의 선생님이었던 Roza(로자)는 이 사립학교와 역사를 같이하는 선생님이었다. 경력을 증명하듯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녀의 강의는 일주일 만에 자기소개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게 해주었다.


Με λενε Σολ. Ειμαι απο την Κορεα. Μενω στο Νεο Ψηχικο. Μου αρεσουν τα ταξιδια και να γραφω. (제 이름은 솔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New Psyxiko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정말 기쁘다! 그리스어로 문장을 만들고, 나를 소개하다니! 헬라어로 말이다!


아쉽게도 수업은 이주만에 끝이 났다. 사립학원이라서 좋았던 점은 소수정예기 때문에 선생님의 관심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80만 원에 육박하는 학원비는 아직 사회초년생으로 지갑이 얇은 필자에게는 사치 아닌 사치. 로자 선생님과 더 공부하고 싶지만, 그리스어 '초짜' 딱지를 이주만에 뗏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어렵지, 첫발을 떼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음 기회가 오는 것 같다. 또 다시 독학을 하며 다음 기회를 기다린다. 그리스어 선생님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그리스의 강의실에서는 항상 그리스 지도가 걸려있다. 마음까지 트이는 큰 창문도 맘에 든다.


학원 마당에서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고, 옥상에서는 저 멀리 아크로 폴리스가 보인다.


학생들을 위해 커피포트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티포트를 마련해 두었다.


학원 주방에 가기 위해 오르락내리락 계단마저도 아트.


한편, 이주 간 4시간씩 매일 학원에 가는 것은 필자에게 소소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학생들을 위해 준비된 커피와 차는 마치 그리스 아침을 맞이하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마당에서 일광욕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마치 내가 휴가를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의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고, 로자 선생님을 통해 그리스 문화도 배울 수 있었고, 온전히 나 자신만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헤어짐이 아쉬워 사진으로 추억을 만든다. 다음에 만날 땐 우리의 공용어가 영어가 아닌 그리스어일 수 있기를 소망하며.


수료식날 선생님들과 학생들. 야마스!


그리스어 입문반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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