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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Jun 30. 2017

생일 증후군

언젠가부터 생일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아니,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지만, 생일 주간만 되면 괜스레 울적해지는 증상이 몇 년 전부터 나타났다. 나를 이를 ‘생일 증후군’이라 명명했다. 이렇게 병명을 붙임으로써 나는 이번 생일에도 아플 만한 핑계를 준비해 놓았다. 여차하면 숨을 수 있도록 말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이를 먹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이것 때문만이 아닌 듯싶었다. 그래서 올해는 생일이 다가올 무렵부터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릿속을 분주히 헤집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생일을 맞이하기는 싫었다. 그리고 발견한 이유의 끝자락에는 만 스무 살 되던 해의 생일날이 있었고, 그 시절의 나에게는 네가 있었다.

  타지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생일이었다. 나는 방학에도 서울에 머물러야 하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기숙사에 남았다. 모든 핑계는 결국 ‘남자친구’에게로 귀결되었다. 당시에 만나고 있었던 나의 첫 남자친구는, 대학교 2학년이던 나에게 세상의 전부였다. 때때로 그는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다. 돌이켜 보니 그는 내게 그런 존재이길 바란 적이 없었고, 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일 리 없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일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나머지, 나는 생일 전날 저녁부터 당일 날까지 거의 이틀을 남자친구와 함께 보냈다. 남자친구는 내가 생일 전날부터 붙어 있는 바람에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가 보다 싶었다. 혹여 딸내미가 생일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까 봐 부모님께서 보내 주신 용돈으로 남자친구와 저녁을 먹었다. 너와 내가 함께한 첫 번째 내 생일이었다.




  내 생일 열흘 뒤에는 남자친구의 생일이 있었다. 나는 일찍이 서로의 이름을 영문으로 새긴 커플 목걸이를 맞추어 놓았고, 열심히 편지를 썼다. 대학로에 같이 보러 갈 만한 공연이 없는지 찾아보다가, 공연 중에 편지 전달 이벤트가 있는 소극장 뮤지컬까지 기어코 찾아냈다. 표를 예매하고 이벤트를 신청했다. 나는 공연 당일 남자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스태프에게 내가 쓴 편지를 몰래 전달했다. 준비는 끝났다.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등장인물 중 하나인 ‘우체부’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 배우가 내가 맡겨 놓은 편지를 남자친구에게 전해 주었다. 생일이신가 보다며 관객들에게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자고도 제안했다. 모든 관객이 남자친구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너와 내가 함께한 첫 번째 네 생일이었다.

  남자친구가 이런 이벤트를 진심으로 좋아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쑥스러워 했지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며 내 멋대로 판단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니 그에게 해 주었던 모든 것들은 사실 내가 받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나는 오롯이 내 취향대로, 내 방식대로 그를 사랑했다. 그가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보상 심리가 생겼던 것인지, 그의 생일이 지나고 나서 생일 편지 정도는 요구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뒤늦은 생일 편지라도 받고 싶다며 끈덕지게 졸라 댔다. 너에겐 닦달이었을 것이다. 내 생일이 한 달쯤 지난 7월 말의 어느 날, 때 지난 카드를 받았다. 조그마한 카드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대여섯 줄 적혀 있었다.

그래도 나는 좋다고 웃었다.

  그 무렵 우리 둘과 같은 동아리였던 한 언니의 생일이 있었다. 동기들끼리 생일 파티를 해 주려고 다 같이 피자 가게에 모였다. 잠시 남자친구가 안 보인다 싶었더니, 다른 남자 동기와 함께 생일 케이크를 몰래 사러 갔었던 모양이다. 촛불을 꽂은 케이크를 들고 남자친구가 돌아왔다.

  언니는 촛불을 껐고, 모든 동기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던 것 같다.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내가 힘들게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가, 분위기를 봐서 슬그머니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는 사실이다.

그곳에는 나는 숨죽여 울었다.




  그다음 해에도, 다다음 해에도 우리의 생일은 돌아왔다. 서로의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함께하기는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해 주었는지, 그가 무엇을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체념하고, 포기하고, 기대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내 모습이 가슴 찌릿찌릿하게 기억난다. 해 주고 싶은 것들을 해 주지 않아야 나는 그나마 서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포기해야만 유지되는 관계가 나와 너의 사이였다. 건강한 연애가 아니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우리는 헤어졌다.

  지나간 그의 잔상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일 무렵이면 그가 원망스럽다. 더 솔직히는 미치도록 밉다. 나는 그때 겨우 스물한 살이었고, 스물두 살이었고, 스물세 살이었는데. 나는 조금 더 사랑받고,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밝게 빛나도 되는 나이였는데 너는 그때 왜 그랬냐고. 아등바등 우리 사이를 지키려고 애쓰던 나를 왜 보고만 있었냐고. 그렇게 대할 거면서 왜 나를 더 일찍 놓지 않았냐고.

  남자친구에게 생일 선물을 받아 보는 것이 내 ‘로망’으로 자리 잡은 건 이때부터였다. 선물의 값어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미리’ 준비했다는, 그 마음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큰 꿈을 꾸었던 것일까,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는 생일날 남자친구가 있었던 적이 없다. 있었다고 해도 생일을 함께 보낼 만큼 오래 만나지 못했고, 썸을 타고 있었다면 그 전에 관계가 엎어졌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생일날이면 올해도 결국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받지 못했구나 싶어 서글퍼졌다. 나를 아껴 주는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 그들과 좋은 시간을 함께했는데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남자친구의 부재에 슬퍼했다. 지난 몇 년간 이러한 패턴이 일종의 관례처럼 고착화되면서, 나는 생일 무렵마다 습관적으로 아팠다. 나는 아직도 첫 연애의 트라우마에서 완벽하게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정공법’으로
생일날을 돌파해 보기로 했다.

누군가의 부재를 느끼지 않도록 아예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나는 하루 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혼자 미역국을 끓여 먹고, 혼자 특강을 듣고, 혼자 병원을 가고, 혼자 글을 쓰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산책을 했다. 오롯이 나 혼자만을 위한 하루였다. 예전에는 홀로 하지 못했던 여러 일들을 나는 이미 혼자서도 즐기고 있었다.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외로움에 울지도 않았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나는 생각보다 괜찮아져 있었다. 나에게는 내가 있었다.

  이렇게 올해의 생일이 끝났다. 이제, 나아질 일만 남았다.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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