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Mar 09. 2017

돌다리도 꼭 두드려 봐야 하나요?

사랑하려는 그대에게 2

  자, 당신 앞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다. 안정감 있어 보이는 돌덩이를 믿고 그냥 건널 것인가, 아니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멩이를 하나하나 두드려 본 다음 건널 것인가. 조금 극단적으로 구분하자면 세상에는 전자에 속하는(혹은 가까운) 사람과 후자에 속하는(혹은 가까운) 사람, 크게 두 부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상황을 조금 다르게 가정해 보자.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내 마음을, 돌다리를 건너 도달하게 되는 저곳이 타인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면, 당신은 누군가의 마음에 어떻게 이르는 편인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와 절친한 선배 한 명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 아니, 후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보였다. (타인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렇게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 선배와 나는 신기할 만큼 비슷한 면이 많은데, 이 점에서만큼은 유독 극과 극의 모습을 보인다.

  자, 이제 선배와 내 앞에는 강이 있다. 흐르는 강물 중간중간에는 양쪽 강가를 이어 주기 위한 돌다리가 놓여 있다. 돌다리가 끝나는 지점에는 내 ‘예선’을 통과한 누군가가 서 있다.

과연 선배와 나는 어떻게 강 저편으로 건너갈 것인가?




  먼저 내가 강을 건넌다. 그런데 투명한 강물에 비춰진 내 모습은 평소의 나와 사뭇 다르다. 마치 만화 ⟨원피스(ONE PIECE)⟩ 시리즈의 주인공 ‘루피’처럼 고무 인간인 내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저 “고무- 고무-”라고 외치며, 고무처럼 쭉 늘어나는 발을 사용하여 강 저편으로 훌쩍 넘어간다. 돌다리를 이용하지도 않는데 돌다리를 두드려 볼 리 만무하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훌쩍 내보인다.

악마의 열매 중 하나인 ‘고무고무의 열매’를 먹고 고무 인간이 된 루피.  온몸이 고무처럼 늘어난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에서 쳐다본 그 사람은 멀리서 바라보았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나를 향해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은 굳게 닫혀 있고, 나를 부르던 다정한 손짓도 더는 없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내가 헛것을 봤나 고민하고 자책하는 사이 그는 뒷걸음치며 서서히 멀어져 간다. 멀어져 가는 그를 붙잡으려고 달려가 손을 뻗으니 냉담하기 그지없는 그의 손이 나를 툭, 밀친다. 나는 퉁, 튕겨져 나와 차가운 강물에 그대로 빠지고 만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선배는 마음 아파하며 말한다.

  “그러니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랬잖아.”

  자, 이제 선배가 어떻게 강을 건너는지 볼 차례이다. 선배는 나와 다르게 아주 찬찬히, 조심스럽게 강을 건널 모양이다. 코앞에 있는 첫 번째 돌에 발을 내딛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혹시 건너는 도중에 돌멩이가 흔들리지는 않을까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어 와 툭툭, 건드려 본다. 퉁퉁, 울리는 안정감 있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강 건너에 있는 저 사람에게로 가도 될지 한참을 고민한다. 그사이 건너편의 남자는 움직이는 듯 흔들리며 위태롭게 서 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겁대가리 없이 ‘돌직구’ 면모를 보이는 나로서는, 선배의 이러한 모습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일단 강을 건너가서 그 사람을 제대로 직시하고 부딪혀 보는 것만 한 최선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혹여 강물에 빠질지언정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옷은 이미 강물에 흠뻑 젖어 버렸고, 예쁘게 단장했던 머리 역시 미역처럼 헝클어졌다.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생채기가 생겼고, 그것은 꽤나 아려서 물기가 서릴 때마다 따끔거렸다.

겪어도 좋은 아픔이란 세상에 없다.

아프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러니 최대한 상처받을 가능성을 줄이는 선배의 방법은 얼마나 현명한가. 그리하여 선배의 방식은 정답이다.




  그런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는,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게 너무 명확해서 신중을 기하기도 전에 마음이 저만치 가 있곤 했다. 어떤 친구는 그렇게 모든 패를 상대방에게 드러내면 안 된다, 그러면 상대방이 너를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며 누누이 경고했다. 완전히 틀린 말 같지 않아서 바뀌어 보려고 노력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나답지 않은 모습을 위한노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더 지질한 반작용을 가져올 뿐이었다.

  그래서 선배가 아닌 나는, 오늘도 내 ‘사랑법’을 합리화하기 위해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한 번 사는 인생은 네가 지닌 마음과 진심을 표현하기에도 짧으니, 나는 네가 애써 숨기고 천천히 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진짜 인연이면 그런 네 모습까지도 포용해 주고, 네가 급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속도를 맞춰 줄 거야” 따위의 따뜻한 말들. 때때로 편파적인 것만큼 강력한 위로는 없다. 그리하여 내 방식 역시 정답이다. 생채기에는 이내 딱지가 자리 잡고, 결국에는 새살이 돋아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최선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마음을 지키는 스스로의 최선을 찾으면 그만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마음속 ‘마지노선’ 하나뿐이다. 내가 얼마만큼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지, 어느 이상으로 다치면 안 되는지를 기억하면 된다. 막상 일어나 보면 강물은 생각보다 얕고 차갑지 않다. 그러나 일어나야만 보인다. 그러니 당신, 건투를 빈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에도 예선이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