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교사의 교직 일지 2
지난주에 전국 시ㆍ도교육청별로 공립 중등학교 교사 임용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나는 부러움을 가득 안고, 다시 나의 불합격 점수를 확인하러 사이트에 들어갔다. 불합격을 인증해야 임용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끊어 놓은 인강 프리패스를 갱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웃픈 현실이라니! 기간제 근무를 시작하게 되면 3-4월은 임용 공부를 전혀 할 수 없을 것이 자명하지만, 그건 그거고 갱신할 건 갱신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지금, 임용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다. 아직 작년 재수 생활의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을 내 스스로 알고 있고, 조급한 마음에 지금 무엇인가를 시작했다가는 새 학기가 시작될 3월에 후회할 것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뭐, 이런 합리화를 하며 아주 오랜만에 어떤 목표를 향해 달리지 않는, 휴지기를 보내고 있다. 꽤 많은 시간 무엇인가를 보고 들으면서 말이다.
그 중 요즘의 가장 핫한 매체라 할 수 있는 ‘유투브(Youtube)’의 시청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유투브가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고 소비될 줄 상상도 못 했지만. 가끔 너무 많은 정보를 쉽사리 접할 수 있어 그것이 나의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거나 내 물욕을 부추길 때도 있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얻게 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나는 다가올 새 학기에 수업 내용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흥미를 끌 만한 시청각 자료는 없는지, 또 교과서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수업 자료로 쓰일 만한 것은 없는지 염두에 두면서 유투브를 시청한다. 특히 영상에 삽입된 자막 중 한글맞춤법상 오류가 있는 장면들은 이미 나에게 기록되어지고 있다. 문법 수업 시간에 활용해야지!
요즘 내가 구독하고 있는 유투브 채널 중 하나는 “Shoot for Love 슛포러브”이다. 이 채널에서는 다양한 스포츠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는데, 최근에 나는 예전 국가대표팀 감독이셨던 신태용 감독님이 우리나라 (초등학생 축구 선수 중 뛰어난 실력으로 선발된) 유소년 유망주를 지도하는 ‘월클 FC(신태용 감독님이 이끄는 유소년 팀의 이름)’의 성장기를 보여 주는 동영상 시리즈에 꽂혀 있다. 처음에는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축구를 이리 잘할 수 있나 신기하고 놀라워서 관심을 가졌다가, 나중에는 그 친구들이 다른 선수들과 붙어서 이겨 나가는 모습에 희열을 느꼈고, 요즘에는 성장기에 있는 어린 아이들을 (분야는 다르지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좋을지 이 시리즈를 통해 고민하고 있다.
사실 나는 월클 FC의 초등학생들의 축구 실력에 경탄해 마지 않으면서도 내가 동영상을 통해 만날 수 없는, 그러니까 월클 FC에 속하지 못한 대부분의 초등학생 축구 꿈나무들이 생각났다. (물론 이 프로젝트에 함께하는 친구들만이 뛰어난 것이 아니란 것도 알고, 지금의 실력이 성인 선수로서의 실력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곧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사촌동생 중 한 명이 축구 선수로서의 삶을 꿈꾸며 그 길을 걸어가고 있어서 더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이 월클 FC에 속한 소수의 아이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다수의 아이들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학창 시절 운이 좋아서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들 틈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의욕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주변 환경은 동시에 나를 위축되게 만들고, 내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임을 일찌감치 깨닫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내가 어느 정도의 자신감 혹은 자존감을 지키며 학창 시절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국어’ 과목에서만큼은 재능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신 성적은 이 믿음을 뒷받침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다른 과목의 성적이 부진할 때에도, 부진한 과목(은 대체로 공부하는 게 가장 내키지 않는 과목이기도 했다)의 공부를 더 오랜 시간을 들여 꾸역꾸역 해 나가면서도 ‘대학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공부만 할 수 있다.’는 기대와 그때가 되면 내 진가가 더 빛을 발하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 덕분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고 돌아 이제는 정말이지 ‘국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겠다며 ‘전공 국어’ 시험만을 치르고 있는 내가, 이렇듯 잇달아 임용 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마치 내 삶을 뒷받침해 준 버팀목이 흔들리는 듯한 상실감과, 내 인생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것과 같은 절망감을 가져왔다. 이곳에는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며, 실패의 경험조차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져다 줄 것이라 덤덤히 말해 놓았지만, 솔직히 요새도 가끔씩 자괴감과 허무함에 빠질 때가 있다. 물론 오랫동안 그러한 부정적 감정에 잠식되어 있지는 않는다. 다가올 3월을 기다리며, 올 한 해는 어떠한 변화든 생길 것을 알기 때문에 이내 털고 일어나는 편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국어 과목에서‘조차’ 그리 두각을 나타낼 만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싶어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한다.
나는 비범함을 꿈꾸었던 것일까?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리라 믿었고, 조금 더 자라서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 왔고, 조금 더 자라서는 점차 내가 보통의 존재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디선가 어른이 되는 것은 내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들었던 것도 같다. 그렇다면 나는 마냥 평범한 사람일까. 아니, 평범함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또 내 특기를 발휘해 본다. (임용 시험은 개개인의 ‘국어’ 능력을 온전히 측정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며, 합격자를 너무 적게 뽑는 이 시험 체제 자체가 비인간적이라는 항변은 일단 접어 두기로 한다.) 내가 비범하지 않은 국어 능력을 가진 국어 교사일지는 모르나, 내가 살아온 이 삶의 내력을 지닌 국어 교사로는 내가 유일하다며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범하다는 것이 사전적 정의로는 비범하다의 반대말일 수는 있으나, 평범하다는 것이 결코 흔하다는 말이나 무가치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출판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보다 실제적이고 재미있는 한 권의 책 만들기 프로젝트 수업을 운영하게 된다면, 글 쓰는 것을 좋아해 온 나의 적성을 살려 보다 유용한 쓰기 교육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평범한 국어 교사이지만 동시에 나만의 개성을 지닌 국어 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월클 FC에 속한 초등학생 (모두가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중 누구는 특히 경기 흐름을 파악하는 시야가 넓다거나, 연계 능력이 좋다거나, 개인 돌파 능력이 뛰어나다는 각자만의 특색을 지니고 있듯이 말이다.
사실 나는 월클 FC의 모습에서 내가 지니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런 복잡미묘한 감정은 잠깐이고 이내 그들의 경기력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어쩌면 ‘승승장구’와는 거리가 먼 듯한 몇 년의 생활을 해 온 것에 대한 대리만족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월클 FC의 모습을 통해 신이 나고 함께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에게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진정한 의미는 월클 FC와의 친선 경기에서 10 대 1로 패배한 영국의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 유소년 팀 코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Q. 경기에 패배하면 어린 선수들이 굉장히 우울해지기 마련일 텐데, 코치님은 선수들을 어떻게 독려해 주시나요?
A. 저희 크리스탈 팰리스 아카데미가 패배에 접근하는 방식은 경기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기면 행복하겠죠. 축구에서는 모두가 이기고 싶어 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게임에서 지더라도 녹화된 영상으로 경기를 분석하고, 잘하지 못했던 부분을 발전시키려 노력하죠. 그리고 패배는 선수들의 정신력을 다시 무장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맞아요, 오늘 우린 졌어요. 그러나 우리가 왜 졌는지 알고 앞으로 어떻게 개선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유소년 친구들이 행복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성장할 수 있게 환경을 잘 만들어 주는 게 가장 중요하죠.
Q. 크리스탈 팰리스 유스 출신 중에 잘 성장한 선수가 많은 거 같아요. 그런 선수들을 어릴 때부터 남달랐나요?
A. 모든 코치들이 말하는 건 코칭 스태프로서 어렸을 때부터 특정 선수가 성공할지 예측하긴 매우 어려워요. 우리는 그저 선수들의 성장 과정 속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저희는 크게 축구라는 틀에서 어린 선수들의 사회적, 전술적, 기술적, 신체적, 심리적인 면을 성장시키는 조력자 역할을 수행할 뿐이죠.
- <Shoot for Love 슛포러브> 신의 한 수: 신태용의 방과 후 트릭
“EP. 28 - 한국 유망주 상대로 10골 먹은 크팰 코치가 경 후 보인 놀라운 반응” 중에서
이 코치님의 인터뷰를 보며 나는 내가 살아온 (굳이 단순화하여 표현하자면) 공부의 길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 온 운동의 길이, 공부의 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또한 월클 FC나 유소년 축구 팀을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의 축구 철학을 통해, 내가 어떠한 교육 철학을 지니고 학생들을 만나야 할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월클 FC에게도, 내가 국어 과목을 가르칠 중학생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승패 혹은 시험 결과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성장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가르칠 아이들의 인생에 잠깐 머물다 가는 한 명의 조력자로서, 각자가 지닌 고유의 빛깔을 발견하고 그 색이 더 빛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어떤 아이는 자연과학 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글의 핵심을 요약하는 데 능하고, 어떤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고, 어떤 아이는 글을 쓰기보다 말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데 뛰어나겠지. 이 아이들의 국어 성적이 모두 같을지라도 이들은 결코 동일한 점수로 평가될 수 없는, 저마다의 특색을 지닌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비범한 인물이 되기를 꿈꾸다 스스로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임을 깨달은 나는, 내가 앞으로 가르칠 많은 학생들이 (확률적으로) 나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 속상하다. 왜 우리 사회는 끊임없는 경쟁의 연속일까 원망해 보다가도 이내, 평범함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모두가 똑같지 않으므로, 결국 모두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평범의 가치는 이러한 역설 속에 존재하지 않을까 결론 지으며 되도 안 한 말장난으로 나의 씁쓸함을 위로하는 요즘, 내가 만날 모든 아이들은 나에게 있어 지극히 평범하지 않은 원석 같은 존재임을 기억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