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교사의 지금 우리 학교는 3
마음의 수명은 너무도 일찍 동이 나고
3월 말에 써 놓은 글을 뒤늦게 올리며 다시 한 번 읽고 있자니, 정말 같은 사람이 쓴 글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자잘한 학교 일들은 쌓여 있는데, 그 일들을 미뤄 두고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스스로 지쳐 있음을 인정하고 글로써 내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것임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3월의 일기를 보니 “부디 이 마음의 수명이 너무 조금 천천히 다해가기를 바라 본다.”는 구절이 있던데, 안타깝게도 나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나는 현재 내 마음속에 비축해 놓은 어떠한 기력과 긍정적인 시선을 상당 부분 소진한 상태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일의 출근이 이전보다 훨씬 두렵다.
지난 두 달간 우리 반 아이들 중 누군가는 학폭에 관련되었고, 당연히 학폭으로 갈 뻔했던 아이들은 훨씬 더 많았다. 남학생끼리 싸우는 경우, 여학생끼리 싸우는 경우, 남학생과 여학생이 싸우는 경우가 모두 있었다. ‘아, 이것이 남녀공학이구나!’를 깨닫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내가 결국 아이들에게 화를 내 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속상하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아이들이 밉기도 하고… 그렇게 아이들과의 마찰이 있는 날이 잦아지며 진력이 다해 간다는 느낌을 4월 중에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것도 복에 겨운 소리였다. 지금은 화를 내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나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생각을 바꿈으로써 빨리 그 상태를 해결하고자 애썼다.
방법은 간단했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는 것’이 나의 기본값이라 여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이 편해져서 조금은 덤덤히 4월을 보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의 수명이 동이 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엔 어떻게 이 시기를 넘겨야 할까. 답이 존재하기는 할까. 답은 역시 방학뿐인가?
여전히 ‘잘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많은 일들에 부닥치면서 나는 나라는 인간이 ‘잘하지 못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꽤 많이 자책하는 편임을 오래 전부터 자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잘하지 못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잘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상태일 때도(이를 테면 처음 그 일을 해 보는 신입/신규인 상황에서도) 나는 내 스스로의 미숙함과 부족함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이러한 성격은 내가 내 인생을 나름대로 치열하게,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 나가게 만든 원동력이었으나 동시에 내 삶을 버겁고 힘겹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잘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데, 뭐 어쩌라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생각보다 잘하는’ 신규 교사 혹은 ‘경력직 신입’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한낱 범인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진리의 ‘학바학’*이라는 말 앞에서, 두 군데 학교에서 보낸 1년 반 동안의 기간제 경험이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 기대만큼 많은 부분을 능숙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학교가 달라졌고, 동료 교사와 학생이 달라졌는데,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그래서 나는 “나는 신규이니까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거나 “신규인데 이 정도만 해도 잘하고 있는 편이다.”며 내 스스로를 때때로 위로해 주려고 노력한다. 이런 생각이 자동 반사적으로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 여전히 나는 ‘노력’을 해야만 현재의 내 미숙함과 불완전성을 겨우 끌어안을 수 있다. 혹여 이러한 내 성향이 타고난 기질 때문이라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니,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내 아이가 이런 면모를 닮을까 염려되고, 그게 아니라 이러한 내 성향이 잘해야 칭찬을 받았던 학교 교육 속에서 사회적으로 습득된 것이라면 지금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되는 것을 보니… 사서 걱정하는 성격이 더 큰 문제일지도.
* 학바학 : ‘학교 by 학교’ 혹은 ‘학생 by 학생’을 의미하는 말로, ‘케바케(case by case)’에서 따온 것이다. 학교에 따라, 학생에 따라 모든 상황이 달라지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교사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말인 듯하다.
나도 그랬기에 할 말은 없고
학생들은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무서운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내 수업 시간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무서워한다기보다 수업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음을 깨달은 두 달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자기 입으로 누구누구 선생님 시간에는 우리 반이 이렇지 않다, 엄청 조용하다는 얘기를 나에게 들려주곤 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선생님 시간에 우리 반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나는 담임 된 입장에서, 내가 아이들을 잘 통솔하고 이끌지 못해 몇몇 교과 선생님들을 특히 힘들게 만든 듯하여 항상 죄송스럽고 민망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당연히 내 수업 시간에도 매일같이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수업 태도와 관련된 지적을 하느라 우리 반의 국어 진도는 1학년 전체 반 중에서 가장 느리고, 이렇게 된 지는 한참 되었다.
아이들이 선생님에 따라 수업 태도를 달리한다는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들을 때에도 기분은 썩 좋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서글픔과 씁쓸함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4월 이후부터 그러한 순간이 가끔씩 내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그 순간마다 회의감과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아이들을 탓할 수도 없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에 그러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가려 가며 수업 시간에 떠들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분명 무섭지 않은 선생님 시간에는 느슨해진 마음으로 수업 시간을 맞이했었으니까 말이다. 무서운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는 늦을까 봐 전속력으로 교실에 달려갔으면서, 무섭지 않은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는 ‘조금 늦어도 괜찮겠지, 뭐’라고 생각하며 분명 교실로 향하는 걸음의 속도를 높이지 않았을 것이다. 무서운 선생님의 수업 준비물을 깜빡했을 때에는 다른 반 친구에게라도 빌리려고 발을 동동거렸을 거면서, 무섭지 않은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는 ‘까먹었다고 말하지, 뭐’라고 생각하며 그냥 교실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사실 기간제로 일했던 시절부터 이런 상황을 겪어 왔던 터라, 올해도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나, 올해는 유독 피로감이 든다. 그리고 유독 내 학창 시절을 온화하고 친절한 기운으로 채워 주셨던, 그래서 무섭지 않았던 선생님들이 많이 떠오른다. 그때 선생님들께서 느끼셨을 고충을 이제 와 내가 피부로 체감하고 나니, 뒤늦게 죄송하고 또 죄송할 따름이다. 부디 내가 그 선생님들의 교직 생활에 큰 생채기를 남기지 않았기를, 제발 그러한 잘못만은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무섭지 않은 선생님이 살아남을 생존 전략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알 수 없다.